삶의 正道 일깨워준 훈장님

침침한 호롱불을 타고 낮게 깔린 신음소리 퍼져 나오면 영락없이 방구석엔 잿물 담긴 대야가 놓였고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광목 한 귀퉁이가 찢겨져 나갔다.

▲ 정선흥 충남도의원 /지영철 기자
물 먹은 풀마냥 퉁퉁 부은 당신의 발을 물끄러미 바라다 보면 어느새 닭 홰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쓰린 발 이끌며 큰 가방 멘 채 150리 장정을 떠남에 삶의 의지를 배웠다.

다 큰 아들 무릎 사이에 앉혀 놓으시고 난데없이 집 마당 한 구석에 정승 같은 서 있는 호두나무 위 제 집 찾는 까치의 귀향을 지켜보라 하시더니 '날짐승도 해 지면 집을 찾아 날갯짓을 하느니라' 하시며 가장과 장손의 역할을 빗대시며 도리를 가르치셨다.

물 반, 고기 반 입질만으로도 참게인지, 뱀장어인지 단박에 알아맞히시는 강태공, 당신 살아오신 이야기에 난세가 잉태한 영웅들의 삶을 곁들이시며 제 타고난 그릇대로 의롭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심어 주셨다.

충남도의회 터줏대감 정선흥(鄭善興·65) 의원에게 아버지 정세환(鄭世煥·90년 작고) 선생은 인생의 항해사이자 함부로 넘볼 수 없는 4선 위업의 든든한 뒷배다.

따지고 보면 청양 땅에 도의원 정선흥이라는 이름 석 자가 각인된 것은 조상 덕이다. 동학운동의 중심에서 민초들의 한을 달래 준 증조부, 논밭도 모자라 당신 자신까지 나라에 바친 애국지사 조부 정상길 (鄭相吉·78년 작고) 선생, 남의 집 숟가락 수만큼 아픈 구석 속속들이 챙겨 주신 아버지까지 듣고 보고 배운 대로 고향을 위해 발이 부르트도록 뛰고 있지만 선대의 발자취에 미치지 못함에 선흥씨 죄책감과 자긍심이 조석으로 교차한다.

▲ 조부님이 애국지사라면 아버지는 애향지사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정이 묻어나는 장면들보다는 날벼락의 순간들이 더 많다.

"이웃들에게는 그리도 다정다감하시고 속 깊게 챙겨 주셨지만 자식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엄하신 분이었습니다. 영화 구경 한 번 못해 봤으니까요. 학교 다닐 땐 혹여 딴 데 정신 팔까 용돈도 주시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종아리 성한 날 없을 만큼 당신 뜻에 이르지는 못했어요."

아버지의 직업은 우체부였다. 돈될 만한 물건은 모조리 독립자금으로 내주시고 목숨을 담보로 구국에 청춘을 바치신 조부님, 감옥을 내 집 드나들 듯하시는 동안 자식들에게 가난과 독립군의 식솔이라는 굴레가 씌워졌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아버지, 벽시계와 자전거를 사고 싶어 일용직으로 우체국에 들어가셨고 닷새 일한 뒤 쌀 한 말 받으시곤 이 길이다 싶어 눌러 앉으셨단다.

첩첩산중 청양 땅을 누비는 동안 누구네 집 뒤주가 비었다는 것과 누구네 집 아버지는 약 한번 써 보지 못하고 병석에서 골골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6·25 전란 중에는 5일장마다 전장에 나간 자식 소식에 오장육부가 타 들어간 부모들이 우체국 앞마당에 장사진을 치고 있는 모습을 자주 목도했고, 시장통 같던 우체국에서 함께 아파하며 낫 놓고 무슨 자도 모르는 이들을 위해 일일이 대독, 대필을 해 주던 아버지의 모습도 생생하다. 너나 없이 헐벗고 굶주린 시절 아버지는 내 집 곳간 걱정보다 이웃집 굴뚝 걱정부터 했을 만큼 동네일에 헌신하셨다.

말단 직원에서 우체국장까지 오르기까지 아직도 선흥씨의 중심을 잡아 주는 일화가 있다.

▲ 70년대 초반 청양 집 앞에서 닮은꼴 2대가 나란히 섰다. 사진 가운데가 조부님, 왼편이 아버지 정세환 선생이다.

당시 체신부 장관이 아버지의 인간 됨됨이를 높이 사 남들 줄 대가며 넘보던 서울 발령을 제의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항아리 중에는 쌀을 한 섬 담는 것부터 한 되 담는 것까지 있지만 당신은 많은 쌀을 담을 수 없는 작은 항아리라는 겸손에 높은 양반이 오히려 한 수 배웠다며 계면쩍어하셨단다.

유난히 기골이 장대했던 선흥씨가 배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중학교 시절. 될성부른 떡잎은 중앙 무대에서 탐을 냈고, 교단에 섰던 외당숙의 반대에 잠시 주저하던 아버지는 제 밥그릇은 챙길 녀석이라는 조부님의 근엄한 한마디에 서울행을 허락하셨다.

한길만 주문하시던 당신 뜻 따라 학업의 끈을 놓지 않은 것이 대학 진학에 큰 도움이 됐고, 성균관대에 입학한 선흥씨 태극마크로 아버지의 기대에 응수했다.

그러나 걱정의 수위는 더욱 높아졌다.

"대표 선수가 된 뒤에는 저를 보실 때마다 뜬금없이 무릎을 꿇리셨습니다. 그리곤 운동선수의 생명은 술집 작부와 같아 '화무십일홍'이라며 몸과 마음가짐을 단속하라고 하시더군요. 아무리 어려워도 화를 내지 말라는 말씀도 운동하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로 가슴에 품고 있습니다."

불을 미처 끄지 못한 담배꽁초로 양복 바지에 구멍을 낸 아버지를 향해 눈물을 흘리시며 금연을 당부하셨던 어머니 돌아가신 뒤 그리도 어렵고 두려웠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어깨며 손을 주물러 드리고 용기 내시라며 자식의 도리를 시작했다.

고향을 떠나 있었다고는 하지만 토요일이면 영락없이 청양으로 가 아버지, 할아버지와 함께 지냈다. 당대 최고의 팀 한전을 거쳐 유공 여자팀 감독이 된 뒤에는 버젓한 차도 제공돼 고향길이 한결 수월해졌다.

선흥씨의 즐거운 음식 봉양도 그 무렵부터 개시됐다.

명절이나 귀 빠진 날 아니면 구경도 쉽지 않은 소고기와 금방이라도 살아나 내 살 돌려 달라고 대들 듯한 생선도 연신 날랐다.

솜씨 좋은 선흥씨 직접 회를 떠드리기도 하고 밤새 사골을 우려 한 그릇 올리면 할아버지, 아버지 진수성찬 부럽지 않은 한 끼를 만끽하셨다.

"소 머리 하나 삶으면 동네잔치를 벌이셨지요. 먹거리 흔치 않았던 때였으니 자식이 할 수 있는 일로 치면 맛난 음식 대접해 드리는 것이 최고의 효도라 생각했습니다."

35년간의 공직생활을 마감하신 아버지, 세월 거꾸로 돌려 신세를 진 친구들 도움으로 상포상을 열었다. 마진율을 최대한 줄이고 한석봉 울고 갈 만큼 야무진 글로 조문까지 작성해 주니 순식간에 충남 제일의 상포상이 됐다.

은퇴 후 노인회장과 체우회 충남 서부지역 회장 등 아버지의 감투는 봉사를 빌어 전성기를 구가했다. 잔병치레도 하지 않으신데다 활동력도 왕성했던지라 병석에 누운 1년은 감내하기 쉽지 않은 고통이었다.

"폐에 물이 차는 병이었는데 병원 문턱을 넘자 이미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내리더군요. 폐에 산소를 공급해 주면 감쪽같이 멀쩡해지시고 다시 물이 차면 고통으로 신음하셨습니다. 병실 동거 1년 동안 제대로 잠을 청할 수 없었어요. 당신 눈길 피해 흐느끼는 날이 많았죠."

병든 부모에게 효도 운운하는 것 자체가 불효라며, 살아 생전 당신들 수족 멀쩡하실 때 정성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칠순을 바라보는 선흥씨가 말한다.

손아랫사람들에게도 큰 몸짓 섞어 먼저 인사를 건네시던 청양 산골 단골 주례선생님, 남의 자식들 행복 빌며 쩌렁쩌렁 당신 삶처럼 옳은 말씀만 건네시던 그 시절 그 풍경이 사무치게 그립다.

조홍시가(早紅枾歌)란? 조선 중기 문인 박인로의 시조로 친구 이덕형의 집에 갔다 홍시 대접을 받고 돌아가신 어버이를 생각하며 지은 대표적인 효행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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