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속으로]⑦ 동강학원 이기원 이사장

? ?
?
? ?
?

명가(名家).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명망이 높은 가문, 그리고 어떤 전문 분야에서 이름이 난 집이다. 주로 문화, 예술계에서 용어가 쓰인다.

명인(名人). 명가는 명인을 만든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혼(魂)’은 ‘인물’을 만나면 더욱 화려하게 피어난다. 사회에 크게 족적을 남김은 물론이다.

충남 서천에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아우르는 명가, 그리고 명인이 있다. 특이하게 교육계에서다.

◆이하복 선생, 그의 아들

요즘은 시골에 가도 초가지붕이 얹혀진 집을 찾기 쉽지 않다. 매년 짚을 갈아야 해 관리가 어렵고 비용 또한 어마어마하게 들기 때문이다. 정부가 고택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로 사라져가는 ‘역사’를 붙잡기 위함이다.

대전에서 차를 몰아 2시간여 만에 도착한 서천군 기산면에서 초가지붕을 만났다. 중요민속자료 197호로 지정돼 있는 ‘이하복 가옥’이다.

이하복 선생은 교육사업가로 일제의 학병입대 권유를 거부하고 고향인 서천으로 내려와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한 인물로 기록돼 있다. 그가 별세한 지 7년 만인 1994년, 지방교육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이 추서되기도 했다.

충청투데이가 찾아간 ‘사람’은 그의 장남인 이기원(80) 옹.

선친의 뜻을 이어가고 있는 그는 여러 직책을 갖고 있다. 청암문화재단 이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명예교수, 동강학원 이사장….

그가 맡고 있는 직책의 공통점은 ‘교육’이다.

한산 이 씨 중시조이자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인 목은 이색 선생은 김구용·정몽주·이숭인 등을 학관으로 채용해 신유학 보급과 성리학 발전에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

이하복 선생과 이기원 옹은 그의 후손으로 이것이 교육의 명가로 일컬어지는 이유다.

취재진이 초가집 앞에서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데 대문이 아닌 사랑채의 문이 열렸다.

허름한 옷차림, 백발이 무성한 머리칼, 얼굴을 덮고 있는 편안한 미소. 어김없는 동네 할아버지였다.

날이 춥다며 얼른 들어오라고 권유한 방에 들어가자 너무 좁았다. 한 명이 겨우 몸을 눕힐만한 공간이었다.

옆 쪽방에는 가옥 내 곳곳에 설치된 CCTV의 영상을 확인할 수 있는 기계가 각종 서적들과 함께 기묘한 ‘동거’ 중이었다. ‘우리가 온 걸 어떻게 알고 마중을 나왔을까’ 하는 의문을 해결해주는 광경이었다. 가옥 내부를 가득 메우고 있는 고서와 문화재 등의 도난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라고 백발의 이 옹은 설명했다.

“어디 앉을 데도 없네요”라며 직접 탄 커피를 권하는 명인과의 대화가 시작됐다.

“모든 실타래는 아버지의 이야기로부터 풀립니다.”

이하복 선생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하지만 1944년 일제가 학생들을 전쟁터로 강제 동원하는 것에 격분, 고향인 서천으로 내려와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다. 그 결실이 동강고등공민학교, 지금의 동강학원을 설립한 것이다.

지주로서 비교적 부유한 삶을 살았던 이하복 선생은 가산을 모두 학교 설립에 쏟아부었다.

“서울에서 학교를 세우지, 왜 굳이 시골에다 짓느냐는 지인들의 질책이 많았다고 해요. 서울에다 지었으면 아마도 지금은 어마어마한 재단이 돼 있었겠죠. 하지만 아버지는 강경하셨어요. 교육은 정말 필요한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철학 때문이셨죠. 그래서 아무 것도 없는 이곳 고향 땅에 학교를 짓게 됐죠. 자식들에겐 숙제만 남긴 분이세요.”

당시 사춘기를 겪고 있는 이기원 옹에게도 아버지의 ‘교육보국(敎育報國)’ 이념이 크나큰 배움으로 다가온 건 당연했다.

1950년 서울대에 입학한 이 옹은 6·25전쟁을 겪은 후 56년 졸업해 59년부터 서울대 시간강사로 학자의 길을 닦기 시작했다. 이후 단국대, 국방대, 충남대 등 유수의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했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부원장을 역임했다.

숙제를 풀기 위해 동강학원 이사장으로 부임한 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87년이었다.

이후 10여 년을 이사장으로 활동하다 동생에게 자리를 넘겼고, 2년여 전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 ?

◆할아버지로 통하는 이사장

보통 학교 이사장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많다. 이 옹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도 예외가 아니다.

막대한 재산을 갖고 친인척들을 주요 자리에 배치하는 1인 통치 공화국.

하지만 주변의 시선과 달리 이 옹은 가진 것이 없는 촌부(村夫)라고 스스로를 단정한다.

그나마 소유하고 있는 180년 역사의 가택은 문화재로 지정돼 있어 명목으로만 권리를 갖고 있고 재단에 소속된 동강중학교 또한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월급을 받는 친인척은 한 명도 없고 스스로도 판공비를 받길 거부하고 있다.

모든 학교 경영권 또한 교장에게 일임했다.

그가 이사장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는 경우는 학생들에게 특강을 진행할 때 뿐이다.

“3~4년 전 군수에게 찾아가 학교를 무상으로 기부하겠다고 한 적이 있어요. 말이 와전되면서 학부모들과 동창회로부터 폐교하려 한다는 오해를 사 무산됐지만 지금도 생각은 같아요. 집도 그렇고 학교도 그렇고 모두 사회에 내놓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어요. 아무 것도 없는 제가 소유주로 있는 것보단 지자체에서 인수해 더욱 멋있는 학교로, 문화재로 만들어 주면 좋잖아요.”

동강중은 교사 8명에 학생이 60명도 안되는 전형적인 농어촌 소규모 학교다.

이런 학교가 사립학교라는 건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

수익을 전혀 창출할 수 없는 환경에 있는 학교를 개인적으로 운영한다는 건 재단의 희생이 없는 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평생을 교육에 헌신한 이 옹과 선친의 철학이 있었기에 동강중은 개교 60주년을 눈앞에 둔 전통 사립학교로 우뚝 섰다.

이사장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한 이 옹은 가끔 학생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걸 낙으로 삼고 있다.

동반자였던 아내 송선홍 여사는 5년 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자녀들도 모두 서울에 거주지를 마련해 홀로 고택을 지키는 이 옹으로선 푸릇푸릇한 ‘꿈’들이 즐거울 수밖에 없다.

“워낙 초라하게 하고 다니니까 아이들이 가끔 할아버지라고 불러요. 학교와 집이 가까워 오며 가며 아이들을 많이 마주치는데 그럴 때면 이런저런 얘길 나누곤 하죠. 애들 잘 되는 게 가장 보람된 걸 보니 확실히 교육이 제 삶의 전부인 것 같긴 해요.”

? ?

◆교육계의 명인

평생 교육과 함께해온 그에게 가장 큰 아쉬움 또한 교육이다.

“좋은 선생은 인격과 학문에 있어 선망의 대상이 돼야 하는데 전 그렇지 못했어요. 좀 더 열심히 살았다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하곤 해요. 그래도 자위하는 게 계몽학자로서의 역할은 일부분 했다는 거예요.”

그는 지식인이 말년에 해야할 일은 고향에서 주민들과 더불어 살며 더 많은 배움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이다.

불행하게도 대대손손 내려온 교육계의 명가는 곧 끊길 위기에 처했다. 이 옹의 대(代)를 잇겠다는 후손이 없기 때문이다.

재단과 가택을 전부 사회에 환원하고 싶다는 뜻도 더 이상 물려줄 이가 없는 상황이 상당부분 반영된 결과다.

그와의 인터뷰 후 안채와 위채, 아래채 등에 숨쉬고 있는 수백 년된 고서들이 더욱 안타깝게 다가온 이유였다.

“자식들 중 누군가가 나서주면 좋겠지만 강제할 순 없는 거잖아요. 가족이 아니더라도 저보다 더욱 훌륭한 인물이 선친의 뜻을 이어주리라 믿습니다. 사람은 사라져도 수백 년을 이어온 가치는 영원히 남을테니까요.”

진창현 기자 jch8010@cctoday.co.kr

사진=홍성후 기자 hippo@cctoday.co.kr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