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홍 청주대 예술대 학장

오늘날의 미술은 추상적이고 기념비적인 거대서사를 표상하던 이전 세대와 달리 자연친화적이거나 삶 주변의 하찮은 이야기를 그린다. 그런 그림들은 보는 이의 감정이입작용으로 주체와 대상과의 거리를 단박에 지워버린다. 이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서구 근대가 토대로 했던 마음과 몸, 논리와 직관, 서구와 비서구의 이분법을 해소하려는 탈근대적 각성이자 노력이다.

백남준의 예술적 동지로도 유명한 요셉 보이스의 '직관'이란 제목의 1960년대 작품이 그 예가 될 것이다. 그는 평범한 나무상자의 상단에 'Intution'이란 단어를 필기체로 쓰고 바로 아래 중심에는 자를 대고 직선을 그은 후 마치 책의 첫줄처럼 좌우에 구간표시를 한다. 그리고 다시 밑에는 시작과 끝이 모호한 한줄기 빛과 같은 직감적인 선을 그었다. 즉 규정적인 선과 비규정적인 선의 대비를 통해 인간의 원초적인 인식방법인 직관을 잃어버린 서구인 혹은 현대인을 비판하면서 불구가 된 인간을 총체적 체험의 장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논리적인 것이나 언어적인 것으로부터 직관이나 말로 할 수 없는 것 혹은 불확실한 이미지로 회귀하는 오늘날의 미술은 확실히 나와 대상사이의 조응현상이랄 수 있는 공감단계를 넘어 감정이입단계로 퇴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퇴행이란 무의식에서 나오는 어떤 욕구에 의해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행위로서 지금 여기서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은 심정 혹은 황혼을 바라보는 센티멘탈한 감정 같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보이스의 작품 '직관'을 보며 아직은 공감단계에 머물 수 밖에 없다. 그의 다소 언어적인 작품을 앞에 두고 감정이입상태로 퇴행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연약함: 감정이입의 마당'(Fragile: Fields of Empathy)전에 출품된 작품들은 그간 미술교과서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해 졌던 오브제 타잎의 미술품에 대해 전시명칭 만큼이나 목소리가 약하고 섬세하다. 대전시립미술관이 프랑스의 생 떼띠엔 미술관 이태리의 웅게리아 미술관과 공동주최한 이 전시회에는 각국에서 50여 명의 작품이 출품됐다.

한국작가로는 권인숙 김수자 이수경 최대진 한명옥이 초대됐다. 우리의 가난했던 시절의 이삿짐 혹은 이불보따리를 소재로 자본주의 현대의 유목(노마드)적 삶을 지표적으로 제시한 작품으로 세계적 주목을 받는 김수자를 제외하고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이다. 그만큼 세계에 대해 열린 그들의 감수성이 이채롭다. 이들 가운데 권인숙은 청주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대전에서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이기에 잠시 언급하자.

그녀의 작품은 둘로 나누어져 있다. 잡동사니로 흐트러진 그녀의 작업실의 일상적 풍경이 섬세하지만 초보적인 미니아춰 기술로 제작되어 있고 그 옆에는 해외여행을 즐기는, 카메라에 담긴 이국적 풍경의 한 귀퉁이에 앞의 미니아춰 풍경을 다시 카메라에 담아 재현한 매우 회화적인 작품이 걸려 있다. 물론 원근법적 풍경이나 재현적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형태가 명료할수록 초월적이고 비재현적으로 다가온다.

전시기획자 로랑 헤기의 기획의도는 발터 벤야민의 '작고 여린 인간의 몸'이란 표현을 빌어 현대인의 본질적 '연약함'을 들춰내어 이를 예술작업의 중심에 위치시키는데 있다. 강고한 정신에 대해 연약한 몸은 작품에서 시적 효과와 함께 감정이입의 능력을 증진시킨다. 반가사유상의 곡선을 마음속으로 애무할 때 느껴지는 감촉, 색이 만져지거나 들리고 소리가 형태를 이루는 것 같은 설명 할 수 없는 느낌의 예술행위는 우리의 정신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기쁘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감정이입이란 적극적으로는 타인의 욕구, 열망, 좌절, 기쁨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느끼는 개인의 능력을 말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생태윤리학적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좋은 전시회가 추운 날씨를 녹일 것이다. 방학을 즐기는 학생들이나 풍요로운 삶을 꿈꾸시는 어른들에게 관람을 권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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