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신군부시절 사형선고 “소신 판결 어려웠다”고인 기리며 “오욕 역사 되풀이 말자” 다짐

"지난 80년대 서슬 퍼런 신군부에 맞서 반대의견을 낸 대법관이 보안사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면서 당시 대법관은 물론 판사들까지도 두려움에 휩싸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 사건을 담당했던 판사들에게 소신 있는 판결을 기대하기는 힘든 사회적 분위기였죠."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대전·충청지역 법조계에 애도의 물결이 일고 있는 가운데 과거 선배들의 잘못된 판단을 반성하자는 법조인들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특히 군사정권에 항거하며, 민주화 운동의 최일선에 섰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법부와의 인연을 악연으로 시작했지만 집권 중 사법부 쇄신에 큰 족적을 남긴 정치지도자였다고 지역 법조계 인사들은 기억하고 있다.

실제 고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독재에 항거, 지난 1976년 3월 1일 '3·1 민주구국선언사건'(일명 명동사건)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2년 9개월의 수형생활을 경험해야 했다.

지난 1980년에는 법원에 의해 생사의 기로에까지 섰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이끄는 신군부는 5·18 광주민주화 항쟁을 내란음모로 규정하고, 김 전 대통령과 문익환 목사, 고은 시인 등 26명을 배후인사로 지목했다.

이 사건이 바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당시 군법회의는 1심에서 김 전 대통령에게 내란음모와 계엄법 위반 등의 혐의를 인정해 사형을 선고했고, 항소심에서도 사형을 유지했으며, 대법원은 상고심에서 사형을 확정했다.

결국 이 사건은 20여 년간 조작 의혹 속에서도 미제로 남아있다 지난 2004년 1월 29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재심 공판이 이뤄졌고, 당시 고법 부장판사를 맡고 있던 신영철 대법관이 무죄를 선고했다.

지역의 한 법조계 인사는 "70~80년대 사법부(司法府)는 사법부(司法部)라고 적을 정도로 행정부의 일개 부처로 전락했던 시절이었다. 중정(중앙정보부) 요원이 법원에 상주해 각종 판결에 관여했고, 심지어 법원 인사에까지 간여했다"며 "아직도 당시 긴급조치 위반 사건에 배석했던 판사들 상당수가 요직에 있는 만큼 이분들에 대한 인적청산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또 다른 법조인도 "한때 사법부에 의해 사형수로 지목됐던 김 전 대통령이 국내에서는 사형제도 폐지를 촉구한 선구적 사형폐지론자로 역사에 남게 됐다"며 "당시 김 전 대통령 사건을 처리해야 했던 이영섭 대법원장은 퇴임사에서 '과거를 돌아보면 모든 것이 회한과 오욕이었다'고 말했듯이 선배의 잘못을 이제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진환 기자 pow17@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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