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강에 '백제'가 없다.

공주에서 부여에 이르는 약 30㎞의 소위 '백제 큰길'은 너무도 볼품 없고 쉼터 하나 없다. 무작정 설치한 가드레일은 시야를 차단해 금강을 보고 싶은 마음을 물거품으로 만든다.

그래서 여기에 쉼터를 만들어 강물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일출과 낙조를 볼 수 있게 하고, 그 쉼터와 전망대를 백제와 연관된 문양으로 디자인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관식, 팔찌, 백제금동대향로에 있는 봉황, 동물, 새, 연화문 등등. 정말 금강은 백제의 유적으로 넘쳐나고 역사의 많은 세월의 켜(Layer) 중에서 백제의 끈끈한 켜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 따라서 금강에 설치되는 시설물에 백제 디자인을 입히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런 표현이다. 그런데 그런게 없다.

더욱이 곰나루, 구드레 나루 등 20여 곳 의 옛 정자들도 백제 디자인의 더 없는 소재가 될 텐데 그냥 버려진 채로 있다.

1950년 7월 15일, 연기군 대평리 금강 일대는 이영호가 이끄는 북한 인민군 3사단이 진을 쳤고 신탄진의 금강 주변은 이건무가 이끄는 북한군 4사단이 도강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에 맞선 미군은 대평리에 멜로이 연대, 그리고 신탄진에 34연대가 포진했다.(멜로이 대령은 1961년 주한 미군 사령관으로 다시 한국에 왔다.)

인민군의 도강을 막기 위해 미군은 공주철교와 대평리 금강대교, 신탄진 철교 등 금강을 잇는 교량을 모두 폭파한 상태였다.

완강한 미군의 저항에 7월 15일 많은 병력을 잃은 인민군은 일단 도강을 포기했다. 강물에는 강을 건너려다 총에 맞은 인민군 시체들이 늘펀하게 떠 있었다.

날이 밝아 7월 16일 새벽 미군의 포격이 불을 뿜었지만 마침내 '금강라인'은 무너지고 멜로이 연대장은 부상을 입어 지휘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미군이 금강전투에서 시간을 끌게 됨으로써 딘 장군의 대전사수도 시간을 벌게 되었고 결국 대구, 부산을 지킬 수 있었다.

금강은 대한민국을 지켜낸 1등 공신이다.

그런데 6·25전란 50년이 넘었는데도 이를 기념하는 기념관 하나 없다. 이런 기념관을 백제로 디자인하여 설립하면 명품이 될 것인데 안타깝다.

'황하(黃河)를 다스리는 자가 중국을 다스린다'는 말이 있다. 정말 중국 역사에서 황하를 빼놓고는 문화도 정치도 이야기 할 수 없다. 황하와 함께 중원의 흥망성쇠가 있었고 문화가 있었던 것.

그래서 1955년 중국의 모택동(毛澤東)은 중국 정주시 하남지방에 '황하박물관'을 짓게 했다. 황하강의 역사, 재난, 토양, 침식, 개발, 물 보전 등등 황하에 대한 모든 것이 전시되어 있다.

오늘 이명박 대통령을 있게 한 서울 청계천 복원사업도 그 대미를 장식한 것은 청계천 문화관이다.

디자인부터 마장동 일대의 랜드마크가 될 만큼 눈길을 끄는 청계천 문화관은 투명소재와 거울 등의 재료를 많이 사용해 물의 이미지를 극대화시켰다. 내부도 볼거리로 가득하다.

태종, 세종, 영조, 정조 임금으로 분장한 안내자가 청계천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는 영상코너는 가장 흥미를 끈다. 청계천과 관련된 지도, 사진, 문헌도 전시되어 있다. 또한 방문자들이 필요에 따라 기념사진도 찍을 수 있게 했다.

따라서 우리 금강도 충남의 근원으로써 정체성을 세우고 충남 내륙지방의 지역문화를 활성화시키는 한편 문화콘텐츠 개발과 문화가치 창출의 기반 확보를 위해 금강문화관 건립이 필요하고, 그것을 백제로 디자인할 때 명품이 된다.

물론 금강에 살고 있는 어류를 비롯한 모든 생태 환경까지 포괄하는 문화관을. 그리하여 후대에 길이 금강의 이야기를 전하자.

변평섭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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