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섭 지방부장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자라… <중략> …달빛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생략>

비장하고 애조 띤 곡조에 폐부를 찌르는 듯한 가사의 이 군가는 '전우야 잘자라'라는 군가의 일부이다.이 군가는 지금 들어봐도 그 당시 피비린 나는 한국전쟁 상황을 너무나 생생한 그려 지금도 등골이 오싹해 진다.

1950년 6월 25일.이날은 평화로운 단꿈 속에 잠겨 있던 우리나라가 일순간에 날벼락을 맞은 날이다.

당시의 북한은 T-34전차 242대, 자주포 176문, 공군기 211기 등 많은 공격용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한국군은 전차는 물론 자주포와 전투기 한 대도 없었다.

또한 우리 국군은 겨우 10만밖에 되지 않았는 데다 그 보잘 것 없는 병력 중 많은 장병이 휴가와 외박으로 부대를 비웠고, 군 수뇌부는 24일 밤늦도록 한 곳에 모여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한다.

이런 허술한 틈을 노린 북한군은 우세한 군사력으로 개전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두 달도 채 안돼 낙동강까지 남진했다.

그때 만약 낙동강 전선까지 무너졌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해 진다.

우리는 그 후 전후 복구와 경제개발에 성공해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1960년대 이후 풍부한 양질의 노동력과 단합된 힘으로 산업화와 국가의 고도성장을 달성했다.

또 풍부한 노동력과 기술개발을 통해 이제는 조선산업, 메모리 반도체 생산량 부문 세계 1위를 달성했음은 물론 고도성장으로 세계 경제 12대국에 올랐으며 국민소득 2만 불 시대를 목전에 두고 있다.

그동안 정부는 이러한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분단의 장벽을 허무는 노력을 시작했다.그 결과 반세기의 산고 끝에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과 지난 5월 17일 역사적인 남북철도 시험운행을 가졌다.

동해선은 57년 만에 북쪽 금강산역에서 출발해 제진역에 이르는 25.5㎞를, 경의선은 56년 만에 남쪽 문산역에서 출발해 개성역까지 27.3㎞를 달려, 각각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상대지역(?)으로 들어갔다 돌아온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반세기가 넘도록 달리기를 갈망하던 남북 열차가 힘찬 기적(汽笛)을 울리며 냉전의 그늘을 벗어나 분단의 한(恨)을 뛰어넘고자 다시 이은 한반도의 허리를 오르내렸다. 남북 간에 철길이 열리는 것은 분단된 국토를 연결한다는 상징성과 함께 남북경협을 한 차원 더 발전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더 나아가 유럽-아시아-태평양을 잇는 '철의 실크로드'는 동북아경제 협력확대에도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로 우리는 너무 이른 환상에 젖었었다.

그러나 예전에도 그래왔듯이 북한 측은 우리를 실망시키는 행동을 곧바로 했다.

북한은 남북철도 시험운행이 있은 직후 '연례적으로 실시해온 통상적인 훈련의 일환'이라고 주장하며 6월 7일 오전과 오후 서해상으로 사거리 100㎞가량의 단거리미사일 1발씩 모두 2발을 발사했다.

이렇듯 저들은 밖에서 하는 말과 안에서 하는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완전한 신뢰를 확보할 때까지는 지나친 환상에 젖는 것은 금물이다. 즉 북측의 전쟁도발에 대한 사죄와 상호 불가침협정이 체결될 때까지는 잠시도 방심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조국을 지키다 이름 없이 산화한 전우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요, 6·25를 맞는 우리의 각오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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