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동 청주시 상당구 지적팀장

조선시대 수많은 암행어사가 있었으나, ‘암행어사’는 박문수(朴文秀, 1691~1756)를 첫 손에 꼽는다.

과거에 몇 번 낙방하다 33세에 문과 병과 16위로 합격해 사관(史官)이 되었다. 집안은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분리될 때 소론 편이고, 경종 때 노론과 소론의 당쟁에서 온건파 소론이었다.

강경파 소론의 집권으로 신임옥사 때 많은 선비와 공직자들을 죽어가던 조정에 들어갔다. 세제(世弟)인 영조를 모셨기에 누구보다 착잡한 심정을 이해하고, 말벗이 되어 신변을 보호했다. 강경파 소론은 틈만 나면 영조를 해치려는 현실에서 청년 박문수 앞날도 예측이 어려웠다. 특히 그가 따르던 이광좌도 정치적 시련을 겪던 살얼음판 분위기에도 우스갯소리로 영조와 주변 사람들을 웃겼으나, 점잖은 공직자들에게 빈축을 받았다.

영조 등극으로 출세가 보장됐으나, 노론의 집권으로 삭직 되어 낙향해 조부, 부친처럼 학문에 열중하려 했지만, 1727년(영조3년) 노론이 조정을 장악하고 사사건건 비위를 거스름에 싫증 난 영조는 소론 영수 이광좌를 영의정으로 임명한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자 3년 만에 복귀하였는데 이때도 남달리 아껴 주었다.

1728년(영조4년) 삼남지방(충청,전라,경상)에서 ‘이인좌 난’ 발생으로, 충청병사 이봉상(이순신 장군 5대손) 회유에 실패했지만, 청주를 함락하고, 한양으로 북상했는데, 진압책임자 오명항 휘하에서 난을 평정해 참찬까지 역임했지만, 삭직 되고, 좌천되고 한때는 귀양도 갔다.

임금을 만날 때도 허리만 약간 굽혔을 뿐, 큰절도 없이 얼굴을 봤다고 한다. 다른 관리들의 힐책에 영조는 군신(君臣)이 딱딱하게 지내면 흉허물 없이 대화할 수 없다고 "부복하지 말고 얼굴을 보라" 했다. 그 임금에 그 신하다. 이런 풍모는 강직한 성품에서 왔다.

박문수가 유명한 것은 높은 관직, 영조의 총애, 학문, 문장도 아니다. 늘 백성을 사랑하고, 고통을 덜어 주려는 마음을 알기에 백성들은 고마움의 표현으로 일화와 민담이 구전(口傳)되어 박문수전이 발간되었다(이이화 인물한국사 참조).

유능한 관리보다 공직자의 부정부패와 눈치 보는 관리가 판을 치는 시기에는 박문수 같은 유능하면서, 청렴 강직하고 국민을 사랑하는 인물이 다시 등장하기를 희망할 것이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