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미 시인

손 미 시인
- 대전 출생
- 2009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 시집 『양파 공동체』,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산문집 『나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상합니까』, 제32회 김수영문학상

카톡이 울렸다. 친구가 사진을 보내왔다. 자동차가 뒤집혀 있는 사진. 내 자동차와 같은 모델인 친구의 자동차는 거의 프레임만 남아 있었다. 깜짝 놀라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트럭에 치였어. 고속도로를 빠져나오려고 우회전을 했거든. 뒤에 따라오던 트럭이 나를 그대로 받아쳤어. 그렇게 친구의 꼬마 자동차는 360도로 데굴데굴 굴렀다. 친구는 그 장면을 구르는 주사위 같았다고 묘사했다.

다친 데는 없어? 몸은 괜찮아? 나의 다급한 물음에 친구는 대답했다. 나 안전띠에 의지해서 거꾸로 매달려 있었거든. 저 멀리서 달려오는 차들이 다 보이더라. 저 차들이 날 치고 가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진짜 무서웠어. 그 와중에 내가 뭐 했는지 알아? 머릿속으로 악보를 상상했어. 혹시 내가 머리를 다쳤나? 악보 잊으면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

피아니스트인 친구는 며칠 뒤 독주회를 앞두고 있었다. 야, 너는 그 상황에. 나는 친구의 말을 잡아채 화를 냈다. 음악을 사랑하는 친구가 징글징글했다. 친구는 내 화를 뒤로 한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뭐 했는지 알아? 목에 감긴 머플러 풀어서 손에 감쌌어. 손 다치면 끝이니까. 손 다치면 피아노 못 치니까. 그렇게 손을 감싸고, 연주할 곡만 계속 생각했어. 왜 그렇게까지 했어? 하는 나의 물음에 친구는 답했다.

피아노가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 말에 울컥했다. 시를 쓰는 나에게 그 말을 대입해봤다. 피아노 자리에 시를 넣어봤다. 시가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랬더니 그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시마(詩魔)라는 말이 있다. 시 마귀라는 뜻이다. "네가 오고 나서 모든 일이 기구하기만 하다. 흐릿하게 잊어버리고 멍청하게 바보가 되며, 주림과 목마름이 몸에 닥치는 줄도 모르고…"라며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 선생은 시마를 언급했다. 시마가 오면 얼이 빠진 사람처럼 시 말고는 아무것도 하기 싫고, 시만 쓰고 싶어 안달이 난다.

나도 한때는 시마가 와서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시를 썼다. 매일 같이 가방에 시를 품고 다녔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시마가 오면 온몸에 힘을 풀고, 기꺼이 제물이 되었다. 그게 그렇게 황홀하고 좋아서 나는 자주 울었다. 시를 쓴다는 건 이 세상이 나로 꽉 채워지는 기분. 그것만큼 나를 충만하게 하는 것이 없었다. 매일 같이 문장을 찾고 감각을 열어 시 귀신이 오길 기다렸다. 가장 치열했고 가장 행복한 때였다.

나는 요즘 시 귀신보다 심사가 뒤틀리면 냅다 누우면서 울어 재끼는 16개월 된 딸에게 더 시달린다. 소파 아래 쌓여 있는 깨진 참깨 스틱과 방마다 흘려놓은 밥풀을 쓸어 담는 게 하루 일과가 되었다. 등에 부적이 붙어서 움찔움찔 나에게 빙의하던 시는 지금, 문밖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 나는 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는데 딸에게 지금 나는 생존을 쥐고 있는 모든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닌 ‘전부’다. 이런 협상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걸 배우고 있다.

친구는 독주회를 잘 마쳤다. 그는 피아노 앞에서 반짝였다. 나는 반짝이고 있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고 오니 문밖에 시 귀신이 서 있다. 덩치가 커졌고, 순해졌지만 여전히 매서운 눈빛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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