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한 충남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지금 사회는 배움의 과정에 있는 학생들에게나 가르치는 선생들에게도 여러 가지 역량을 기르고 발휘할 것을 기대한다. 스마트폰, 자율주행차, 챗GPT 등 새로이 개발되는 기술들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산업, 문화를 점점 더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기에 예전처럼 하나의 기술이나 역량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평생직업이라는 말이 무의미해지고 대신 평생교육이란 말이 더욱 중요해지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최근 대학에서 전통적인 전공보다도 융합전공, 연계전공, 자기설계전공 등 새로운 개념의 전공이 강조되고 나아가 무학과가 언급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이 흐름 속에서 우리가 좀 더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의 역량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상황에 현명하게 대응할 수 있는 유연성이 요구된다. 이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판사판(理判事判)’이라는 고사성어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될 대로 되라’는 뜻을 넘어 의미심장한 교훈을 준다.

원래 ‘이판사판’이라는 말은 숭유억불 정책으로 어려움을 겪던 조선시대 불교로부터 유래하였는데 몇 가지 다른 해석이 있다. 당시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많은 절에서는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참선 및 경전 공부와 같은 수행에 집중하는 ‘이판승(理判僧)’과 재무 및 사무와 같은 절의 현실적인 운영을 전담하는 ‘사판승(事判僧)’을 구분하였다. 당시 스님은 매우 낮은 신분이었기에 이판승이든 사판승이든 스님이 된다는 것은 인생의 마지막을 의미하였다. 그리하여 이판사판이 ‘끝장’이나 ‘마지막 궁지’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는 게 하나의 해석이다. 다른 해석으로는 이론을 다루는 이판승과 실제를 다루는 사판승 간 갈등과 대립이 절 내에서 극심하여 서로에게 극단적인 감정을 갖게 되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이판사판이 ‘극단성’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판승과 사판승이 각자 맡았던 일은 불교 자체를 위해서 궁극적으로 어느 한쪽도 가볍게 볼 수 없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원래는 이판과 사판을 겸하는 것이 스님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즉, 불교의 이상을 연마하면서도 현실을 함께 돌보는 ‘중용’의 모습이 스님들의 참된 역할이었다. 오늘의 학생들이 추구해야 할 인간상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이(理)’와 ‘사(事)’의 균형, 즉 이론적 지식과 실제적 적응력을 조화롭게 갖출 때 진정한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선생도 마찬가지이다. 자신만의 학문이나 이론에만 스스로를 가두거나 혹은 반대로 학문 외적인 직책이나 자리에만 연연하지 말고, 다른 학문이나 이론과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고 동시에 강의실이나 연구실 안과 밖, 그리고 학교와 사회를 연결하고자 하는 마음자세와 실천이 필요하다. 이것이 배움과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적인 ‘지혜’의 핵심이기도 하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