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형(한동대 국제지역학과 국제정치학 교수·전 국립외교원장)

2023년이 저무는 시점에서 윤석열 정부 1년 8개월의 대외정책을 정리해본다. 출범 초기부터 전임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평화프로세스를 가짜평화로 규정하고 전쟁 불사와 선제공격까지 거론하며 대북 강경노선을 천명했다. 문제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면서 남북관계의 악화는 방치하고 있다는 데 있다.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위해 북핵을 해결하자면서 전쟁 위기 가능성을 키운다. 북한을 멸절해야 할 악이라는 사고는 북한과의 화해는커녕 적대적 충돌도 불사한다. 심지어 북한 주민들의 식량난을 떠벌이면서도 인도적 지원은 외면한다. ‘담대한 구상’은 한반도평화를 끌어내는 담대한 제안이 아니라, 북한이 항복하면 대담하게 돕겠다는 말이다. 북한이 항복할 방안 없이 국내 과시용 헛된 구호로만 남은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의 복제판처럼 보인다.

대외정책 노선은 친중-반미로 규정하고, 철저한 친일-친미의 진영편향으로 일관했다. 겉으로는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를 지향한다고 말하지만, 그리고 잦은 해외순방을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의 직무라고 강변해도 이념편향의 진영 외교가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이 압박하고, 일본이 부추기는 가운데 북한, 중국, 러시아를 적대적으로 대하며 ‘돌격 앞으로’를 외쳐왔다. 한국 외교가 한·미, 한·일, 한·미·일 연대만을 중시하는 가운데 외교적 입지는 줄어들고, 국익의 공간은 좁아져 버렸다. 윤석열 대통령이 ‘가치’라는 신기루에 집착하는 사이 한국은 국제무대에서 변방으로 밀려나고, 투명한 존재처럼 취급당했다.

윤석열 정부의 외교·안보·통일 분야는 정책과 노선부터 인적 구성까지 이명박 정부의 부활과 다름없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김대중의 햇볕정책과는 반대로 거센 바람으로 북한의 옷을 벗기고야 말겠다는 것이었다. 북한을 다른 국가와 똑같은 기준으로 외교부가 맡으면 된다며 통일부를 폐지하려고 했었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반공교육에만 집중하는 부서로 전락시켰었다. 윤대통령이 북진통일과 북한 붕괴론을 주장해온 사람을 장관으로 임명한 맥락과 목적도 유사하다. 남북교류 부서를 대폭 축소하는 한편, 북한 인권부서를 확대하는 등 부처를 무력화하기 위해 장관을 보내는 방식으로 변경했을 뿐이다. 통일부 공식행사나 보고서에서 금기어가 ‘평화’라는 점은 충격적인 동시에, 윤정부의 실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어렵게 축적한 화해협력과 주변국 외교의 공든 탑을 이명박 정부가 일시에 무너뜨려 버렸던 것처럼,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평화프로세스를 철저히 망가뜨렸다. 신원식 국방장관이 최근 전군 지휘관 회의에서 한반도평화프로세스를 ‘한편의 잘 짜여진 사기극’이라고 한 발언에 대북관이 그대로 담겨 있다. 북한의 비핵화를 달성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더욱 핵무기 개발에 매달리게 만들고, 중국과 러시아와의 결속 강화를 초래해 비핵화의 길은 멀어져 버렸다. 남한과 북한은 최악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두 보수 정권은 쌍둥이처럼 민족의 운명을 위태롭게 만든다.

윤 정부의 외교 철학은 미국의 네오콘과 일본 극우와 매우 유사하다. 미국의 신보수와 일본 극우는 2018년 한반도평화 프로세스를 방해하고 망친 주역들이다. 북미정상회담의 성공과 한반도평화 구축은 그들에게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악몽이었기 때문이다. 극우 근본주의의 더욱 무서운 본질은 비열한 엘리트주의에 있다. 윤정부에 네오콘의 속성과 함께 트럼프식 분열 정치의 모습이 자주 투영된다. 국내외에서 적군과 아군을 철저하게 분열한 다음, 지지자들을 위한 정책으로 정치적 결집을 구축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패턴이다. 그의 원래 성정인지, 경험이 만들어낸 결과인지, 아니면 참모들이 의도적으로 국내정치적 계산에서 벤치마킹하고 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모두 해당할 수도 있다. 트럼프의 4년 집권 기간 평균 지지율은 35% 내외이며, 과반을 기록한 적이 없다. 그는 지지층을 확대함으로써 미국 전체의 대통령이 될 생각 자체가 없었으며 열성 지지층만을 위한 권력자였다. 콘크리트 지지층의 열성이 투표장으로 이어지면, 35%의 지지율로도 권력을 잡을 수 있고, 유지할 수 있다는 선거전략이었다.

윤석열 정부는 트럼프의 전략을 채택한 것 같다. 한국의 정치문화가 다양한 이념의 스펙트럼을 가진 유럽보다 극단의 두 정치세력이 충돌하는 미국을 빼닮았고, 양당제의 정치구조는 이를 강화한다. 트럼프가 바이든의 민주당을 향해 공산주의자라고 공격하는 것처럼, 정부 여당과 지지자들은 좌파와의 전쟁이라는 프레임을 활용한다. 2024년 4월 한국의 총선과 11월 미국의 총선에서도 여지없이 작동할 것이다. 안보 논리에 짓눌리기 쉬운 분단국가, 전쟁이 종식되지 않은 국가에서 눈부신 민주화를 이룬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에서 권력을 위해 50년 전 냉전체제와 이념전쟁을 재활용하는 아픈 현실이다.

2024년의 한반도는 짙은 안개 속으로 접어들고 있다. 9.19 남북 군사합의가 폐기되어 무력 충돌의 위험이 커지고,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 악화로 외교는 물론이고 경제 전망도 암울하다. 불과 수년 전에 품었던 G7을 넘어 세계 5강으로도 갈 수 있다는 희망은 백일몽처럼 사라졌다. 21세기는 지구적 협력과 통합의 질서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국가 간 파편화와 대결의 질서가 거대한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나쁜 상황이 바로 미국과 중국의 적대관계가 악화하는 상황에서 남북의 대결적 긴장이 심화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북-중-러와 한-미-일의 진영 대결구조가 심화한다면 평화는 요원해진다. 정전체제 70년 후에도 전쟁을 끝내는 노력보다 군비경쟁과 진영화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목표는 모든 희생을 불사하는 승리가 아니라, 자제와 타협을 통한 평화이다. 대한민국이 더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대외정책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정부가 하지 않는다면, 시민의 힘이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것만이 2024년의 대한민국이 위기를 벗어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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