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고도 제한 완화를 조속히 해결하려면 대통령, 국토부 장관, 서울시장과 직통 핫라인이 있는 여당 구청장이 꼭 필요하다." 국민의힘 대표 김기현이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사전투표일을 하루 앞둔 10월 5일 최고위원회의에서 국민의힘 후보 김태우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면서 한 말이다. 그는 "대통령과 핫라인이 (연결)돼서, 해달라고 요구하고 전화해서 대통령에게 ‘도와주십쇼’ 해야 싹싹 될 것 아니냐"고도 했는데, 그런 핫라인이 없는 야당 구청장은 어쩌라는 걸까?

10월 11일에 치러진 선거에서 국민의힘은 17.15% 포인트 차로 완패했다. 다음날 민주당 의원 조응천은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여당은 선거운동을 하면서 제일 내세운 게 ‘(후보와 대통령 사이에) 핫라인이 있다’"였는데 "그게 전혀 득표 요인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감표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 그런 생각"이 든다고 했다.

‘핫라인’ 발언이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쳤건 보다 중요한 문제는 그것이 지방자치제와 공정의 정신을 정면으로 위반하고 훼손한 추태였다는 점일 게다. 이 점이 제대로 부각되지 않은 이유는 여야 모두 이 선거에 ‘총력전’으로 임할 만큼 광분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구청장 보궐선거라고 하는 작은 선거 하나에 나라의 명운이 걸린 것처럼 그 의미를 과장하고 왜곡하는 건 한국 정치판에서 처음 보는 일은 아니지만, 그게 얼마나 큰 문제인가에 대해선 우리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한국은 원래 ‘정치 과잉’의 나라였다. 주한 미국 대사관 문정관으로 일하던 그레고리 헨더슨은 전쟁 중이던 1951년 한국 곳곳을 여행한 뒤 "길에서 밤을 지새우는 거지조차도 정치 문제를 명쾌하고 열정적으로 논할 정도였다"라고 썼다. 그는 한국인의 ‘정치 과잉’을 한국인들이 중앙권력의 향배에 따라 생명을 포함해 자신의 운명이 좌우되는 시대를 살아온 오랜 역사의 산물이라고 봤다.

미국으로 돌아가 정치학자가 된 헨더슨은 1968년에 출간한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라는 책에서 이후 반세기 넘게 한국사회를 집어삼킬 거대한 소용돌이의 정체를 날카롭게 파헤쳤다. 그 소용돌이는 바로 ‘중앙과 정상을 향한 맹렬한 돌진’으로, 이후 계속 심화될 ‘서울 공화국’ 체제에 대한 경고였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정권의 기획에 따라 모든 권력과 부와 기회가 집중된 서울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하는 삶을 살게 된다.

총선이나 지방선거에서 유권자들에게 가장 잘 먹히는 선거 구호는 "나 중앙에 줄 있다"며 자신의 ‘줄’을 과시하는 것이다. 줄이 튼튼한 사람이 예산을 지역으로 많이 가져올 수 있다는 걸 유권자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줄’은 아무래도 전직이 화려한 사람들에게 유리하다. 역대 정권들은 그 점을 악용해 ‘단기 장관’을 양산해왔다. 총선이나 지방선거에서 여당 후보들을 많이 당선시키기 위해 장관직을 비롯한 고위직 간판을 만들어줌으로써 국정운영을 선거의 졸(卒)로 이용하는 짓을 저질러 온 것이다.

여당이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핫라인’을 강조한 것도 바로 그런 풍토와 관행을 이용해보겠다는 것이었겠지만, 그들은 한가지 큰 착각을 했다. ‘핫라인’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한 것, 즉 정권의 운명을 놓고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간과한 것이다. 정치를 늘 ‘기세 싸움’으로 이해하는 발상은 여야 정당들 뿐만 아니라 보수·진보 언론까지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는 처음부터 각 정당의 ‘사활(死活)’을 건 전쟁이요, 그 결과는 어느 한 정당에게 ‘치명타’가 된다는 선전·선동이 난무했다. 선거 관련 기사 제목으로 가장 많이 쓰인 단어들이 ‘사활’과 ‘치명타’였다는 것이 그걸 잘 말해준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가 지극히 예외적인 선거였다면 별 문제의식 없이 그냥 넘겨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그렇질 않다는 데에 우리의 고민이 있다. 무슨 선거건 늘 ‘사활’과 ‘치명타’가 빠지는 법이 없으며, 총선과 지방선거는 ‘중앙과 정상을 향한 맹렬한 돌진’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겨진다. 특히 지방선거에 지방이 없다는 건 이젠 비밀도 아니다. 왜 우리는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이냐?"고 외치면서 화를 내지 않는가?

우리는 화내는 법을 잊은 지 오래다. 모든 분노는 오직 중앙의 정상에 선 사람들만을 향하며, 증오와 혐오도 그들에게만 쏟아 붓는다. 정치적 갈등을 다룬 기사의 댓글을 보라. 윤석열과 이재명에 대한 욕설, 아니 저주가 흘러 넘친다. 한국정치의 익숙한 풍경이라곤 하지만,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악화된 데엔 대통령 윤석열의 책임이 가장 크다.

그러나 윤석열은 그걸 모른다. 그는 보궐선거 패배에 대해서도 사실상 여당 탓만 하고 있다. 그가 지지율에 신경쓰지 않고 마이웨이를 가겠다는 신념에 변함이 없다면, 이번 선거의 패배 책임도 자신에게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선거는 지지율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야당은 과거에 진보를 스타일, 그것도 거칠고 싸가지 없는 스타일로만 실천한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지금 윤석열이 하는 게 바로 그런 방식이다. 다른 건 다 제쳐 놓더라도, 왜 아무 실속도 없는 강성 발언을 남발해 ‘극우’라는 말까지 듣는가?

나는 그 이유를 그의 다변(多辯)에서 찾고 싶다. 회의 1시간 중 59분을 혼자 말한다고 해서 나온 ‘59분 대통령’이라는 말은 농담일망정, 대통령의 말이 너무 많다는 데엔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의하는 것 같다. 말이 많다 보면 숙성되지 않은 생각마저 정리되지 않은 거친 방식으로 발설하기 쉽고, 가끔 뭔가 ‘임팩트’가 있는 발언을 하고 싶다는 유혹을 받기 마련이다. 그 결과는 현실과의 접점이 박약한 강성 발언의 양산이다.

진보 30%, 보수 30%, 무당파 40%는 한국 정치판의 불변의 법칙이다. 무당파 40% 중 선거의 승패를 결정하는 10-20%의 유권자는 분위기에 민감하다. 그들은 타당성 여부와 무관하게 자꾸 ‘극우’라는 딱지가 들러붙는 정치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치는 이들을 보고 하는 것이어야지, 강성 지지자들만 흡족하게 해주는 ‘팬덤정치’는 종국엔 자해(自害)가 되고 만다. "메아 쿨파, 메아 쿨파, 메아 막시마 쿨파(제 탓입니다. 제 탓입니다, 제 큰 탓입니다)!"를 외치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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