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경북대 명예교수, 참여정부 정책실장)

이 세상에서 어머니의 사랑만큼 거룩한 게 있을까. 양주동 작사, 이흥렬 작곡의 ‘어머니 마음’ 노래를 들으면 언제나 가슴이 뭉클해진다. 어머니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자식 잘 되기만을 바란다. 자나 깨나 오직 자식 생각뿐이다. 아버지도 꽤 역할을 하지만 어머니와는 비교가 안 된다. 5월 8일은 본래 ‘어머니날’인데, 그걸 구태여 ‘어버이날’로 고칠 필요가 있었을까. 책에서 이런 걸 읽은 적이 있다. 아프리카에 놀러간 백인들이 장난삼아 원숭이 새끼를 한 마리 잡아 배에 싣고 강을 내려갔는데 어미가 울며불며 계속 배를 따라 강둑을 달려 왔다. 나중에 그 어미는 결국 탈진해 죽었는데 배를 갈라보니 애간장이 다 녹아 없어졌더라는 이야기다. 인간의 잔인함과 모성애를 동시에 느끼게 한다.

해마다 8월이 오면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역시 오래 전 어느 책에서 읽은 실화인데 책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사상 최초의 원폭이다. 검은 버섯구름이 피어오르고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고 하는데 그게 그렇게 끔찍한 무기인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날 어느 젊은 주부가 시내에 볼일을 보러 갔는데 밤이 돼도 돌아오지 않았다. 가족들은 밤새 불안에 떨었다. 다음 날 무슨 시커먼 불에 탄 듯한 개 비슷한 동물이 집 마당에 나타났다. 애들이 막대기로 때리며 쫓아내도 기를 쓰고 집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이상해서 유심히 보니 말은 못하지만 바로 애들 엄마였다. 시내에 나갔다가 원폭을 맞고는 중상을 입어 걸을 수가 없어 엉금엉금 결사적으로 기어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시간이 한정 없이 걸린 것이다. 그 엄마는 곧 세상을 떠났다. 기어서라도 집에 와서 애들 얼굴을 보겠다는 그 엄마의 심정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당시 일본이 최후 발악을 하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고, 어차피 일본 패망은 시간 문제였는데 기어코 그 잔인한 원자폭탄을 투하했어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든다. 유럽 전선에서 이탈리아, 독일이 패망한 뒤 공격 목표를 일본으로 돌린 소련 군대의 남진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빨라 한반도를 미국보다 소련이 먼저 점령할 것은 물론이고 전후 새로운 국제질서에서 소련의 발언권이 강해질 것을 두려워한 미국이 원폭 투하라는 비상수단을 동원했다는 설이 있다. 원폭 개발(맨하탄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 등 여러 과학자들이 그 뒤 인간의 양심에 입각해 원폭, 수폭에 반대하는 입장에 선 것은 과학자의 양심을 보여준다.

모성애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를 최근 읽었다. 경북대에 같이 재직했던 어느 선배 교수 한 분이 문집을 보내왔는데 그 속에 자기가 대구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비산동 어느 허름한 집에서 자취하던 이야기를 써놓았다. 얼마 전 그 집을 찾으러 두 번이나 갔는데 새 건물이 들어서 있어 실패했다고 한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옛날 생각이 간절해지는 모양이다. 사라호 태풍이 한반도를 강타했던 1959년 무렵의 이야기다. 그 교수의 본가는 대구 옆에 있는 성주군 하빈면이었고, 그는 당시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겨울에 시골집에 갔다가 대구로 돌아올 때 자기는 쌀을 지고, 어머니는 김치를 옹기 단지에 담아 머리에 이고 대구 자취방까지 왔다.

추운 겨울날 모자가 시골집에서 신동역까지 6㎞를 걸었고, 신동에서 대구까지는 기차를 탔고, 대구역에서 기차를 내려 비산동 자취방까지 4㎞ 남짓한 거리를 다시 걸었다고 한다. 그 무거운 김치동이를 머리에 이고 추운 겨울 날 10㎞를 걷는 어머니의 정성을 생각해보라. 추운 날씨인데도 무거운 단지를 머리에 이고 먼길을 걷는 어머니의 이마에 흐르던 땀방울을 아들은 생생히 기억한다고 썼다. 먼 길을 힘들다는 말없이 아무런 내색없이 묵묵히 걷던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면 나는 비록 남이지만 무한한 감동과 존경을 느낀다. 나는 오래 전 그 교수의 모친상 때 시골집에 문상하러 갔는데, 그때는 그 어머니가 그렇게 위대한 분인 줄을 몰랐다.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았고, 학교 근처에도 못 가본 분이었지만 세상 누구보다 위대한 어머니시다.

또 한 사람의 어머니도 잊을 수 없다.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가 터졌을 때 이런 기사가 났다. 192명의 희생자 중 영천에 살던 여성이 있었다. 그는 남편 없이 어린 남매를 키우며 시어머니를 모시고 영천에 살고 있었는데 혹시 대구에 일자리가 있을까 해서 알아보러 왔다가 하필 그 지하철을 탔다. 연기가 번지고 화마가 심해지자 이 어머니는 사태를 직감하고 마지막 순간에 시어머니에게 휴대전화를 걸어 애들 잘 부탁한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나는 당시 참여정부 인수위원을 맡고 있어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를 모시고 바로 대구에 내려와 화재 현장에 갔고, 영남대 병원을 방문해 입원한 부상자들을 위문했다. 지하철 참사 현장은 내가 평소에 자주 다니던 곳인데 그 시커먼 동굴 같이 변한 모습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나는 며칠 뒤 새 정부의 대통령 정책실장을 맡게 되어 그해 6월 29일 대구 시민회관에서 열린 합동영결식에 정부 대표로 참석했다. 영결식 내내 나는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옆자리에 앉은 정동영 의원도 계속 울고 있었다. 그때 영천의 어린 남매는 지금은 20대의 청년으로 잘 살고 있을까. 그 시어머니는 아직 살아계실까 두루 궁금하다.

모성애 이야기를 하니 우리 어머니가 생각난다. 나는 초등학교 때 매우 병약했다. 1학년 초에 내 짝한테서 백일해를 옮고 연달아 늑막염, 홍역을 앓아 1년 내내 병원 신세를 졌다. 학년이 올라가도 아파서 결석을 밥 먹듯이 했고 6년 동안 개근상을 한 번도 못 받았다. 5학년 때 쯤 내가 아파서 밥을 못 먹으니 어머니가 매일 밈을 쑤어 냄비에 담아 점심시간에 학교에 갖고 오셨다. 운동장 나무 그늘에서 내가 몇 숟가락 먹는 걸 보고는 기뻐하시며 남은 음식과 그릇을 주섬주섬 보자기에 싸서 돌아가시곤 했다. 그 귀찮은 일을 전혀 귀찮은 내색 없이 하셨다. 어머니의 정성과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을 것이다. 

※이 기고는 지역신문인 영남일보(대구·경북), 중부일보(경기), 무등일보(광주·전남)와 함께 게재됩니다. 사외(社外)기고는 본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