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승룡 영춘중학교장
▲ 박승룡 영춘중학교장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최초로 수성전에 성공한 진주성에는 또 다른 승리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것은 6·25전쟁 당시 미 제25사단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육군 제1206건설공병단이 1968년 11월 10일에 건립한 6·25전쟁 진주지구 전승비이다.

이 비에는 6·25전쟁이 발발하고 진주지구까지 쳐들어온 북한군 제6, 제9사단을 맞아 미 제25사단의 킨 기동부대가 서북쪽 무명고지를 놓고 공방전을 벌인 끝에 막아 낸 전투사가 기록되어 있다. 피의 협곡으로 불릴 만큼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방어했기에 국군은 낙동간 전선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유엔군 총반격의 기반이 되었다. 이렇게 진주지구에서 방어한 8일간의 전투가 없었다면 나라의 존망은 백척간두였기에 전승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투는 단양에도 6·25전쟁 당시 있었다. 그것은 7일간의 방어 전투를 단양의 남한강변과 죽령 일대에서 전개, 돌출 전선을 계속 확보함으로써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킨 기록이 그러하다.

1950년 7월 6일, 단양중학교에 개설한 국군 제8사단 지휘소의 작전계획에 따라 매포초등학교에 설치한 북한군 제8사단의 전방 지휘소 습격을 기점으로 남한강변에 구축한 전선에서 격전이 펼쳐졌었다. 그러다가 군사력의 열세로 단양을 상실하고 국군은 죽령까지 철수하게 된다. 하지만 수시의 반격전은 물론, 봉우리 축차 지연전을 벌려 7일 동안 전선을 지탱, 초조해진 북한군으로 하여금 충주 공략에 투입된 제12사단을 단양 전투에 전용케 함으로써 아군에게 전열을 정비하고 작전 수행을 할 수 있는 여력을 만들게 하였다. 이러한 단양지역 7일간의 전투는 능히 진주지구 방어전에 비견할만하며 실금산, 양백산, 431고지 등에 잠들어 있는 호국 영웅들도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보훈의 달이다.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기억하고 보훈해야 하는 그런 때이다. 그러자면 기억의 흔적을 살려 확인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역사를 저장한 사람들의 기억을 열어 그 내용을 기록해야 한다. 역사의 정립은 기억의 저편에 있는 흔적을 불러 기억의 이편에 기록으로 존재하게 하는 일련의 작업이다. 그래야만 역사의 강줄기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그 기록을 확인하며 되살릴 수 있다.

그러므로 단양지역 6·25전쟁사는 역사로 각인하여야 한다. 격퇴가 아닌 지연의 전투였지만 전쟁 발발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될 정도로 막강했던 북한군의 군사력을 감안할 때 7일간의 단양 전투는 국군의 방어선 구축과 재정비의 기반을 확보하게 한 점에서 가히 그 의미가 점층하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통한의 비극인 곡계굴 사건, 후퇴하는 북한군과 교전을 벌이다 전사한 13인의 용사, 단양의용특동대원들의 활약 등도 충분히 단양지역 6·25전쟁사의 한 축을 지탱할 수 있기에 더더욱 역사적 기록의 활동, 그 작업의 기폭을 게을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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