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상 충남소방본부장

아이들이 유치원 시절 종종 바닥 밑에 가늘고 긴 실을 서로 연결한 종이컵 전화기를 만들어주곤 했다. 안 들릴세라 서로 고래고래 외쳐대니 굳이 실과 종이컵이 없어도 될 때가 대부분이었고, 가끔은 너무 세게 잡아당겨 실이 떨어진 줄 모르고 종이컵에서 목소리가 들린다며 신기해하던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 요즘에야 아이들의 스마트폰 과다 사용이 부모들의 걱정거리가 됐지만, 과거에는 전화기만큼 우리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 없었기에 재미있게 전화기 원리의 이해를 돕는 참 건전한 놀이이자 교육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전화는 위급 상황에서 그 중요성과 위력은 최고조에 달한다. 스스로 위험에 처하거나 위험을 발견하면 우리는 조건반사적으로 전화기를 들고 119를 찾지 않는가. 전화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물리적 한계 없이 119와 맞닿아 있다는 믿음이 우리 국민 모두의 DNA에 깊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곧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평생 자신과 사회를 지켜낼 수 있는 지식과 가치관을 심어주기 위한 사회적 노력의 성과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화기가 있어도 정작 말로 자신의 상황을 표현하기 어려운 분들이 있다. 바로 청각·언어·발달 장애인과 우리말에 서툰 외국인들이다. 작년 기준 우리 충남에는 2만 3000명이 넘는 청각·언어 장애인이 거주하고 계신다. 외국인도 6만 7000명으로 집계되는데 농번기나 수확철에 일시적으로 우리 도에 머무르는 분들까지 포함한다면 훨씬 더 많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분들은 그동안 119에 신고하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거나 문자 메시지를 활용해야 했고 그마저도 정확하게 상황이나 증상을 표현하기 어려웠다. 이를 위해 충남소방은 지난해 전국에서 처음으로 ‘119 수어 통역서비스’를 도입했다. 신고자와 119대원, 수어 전문 통역 기관인 손말이음센터 수어 통역사가 3자 통화로 의사소통을 하게 되는 구조이다. 실제 서비스 도입 이후 많은분들의 응원 속에 상시 운영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언어 소통이 어려운 외국인과 청각·발달 장애인을 위한 ‘그림으로 보는 문진표’도 개발해 운영하고 있다. 대웅제약과 피치마켓에서 공동으로 제작한 ‘참지마요 프로젝트-몸이 아파요’의 삽화를 토대로 응급환자별 주요 증상과 병력, 각 신체 부위를 나누어 체계적으로 환자를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한국어는 물론 영어와 중국어 등 8개국 언어를 그림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자신에 해당되는 그림을 단계적으로 손가락으로 짚기만 하면 된다. 이 정보는 환자 상태를 평가하는 중요한 정보가 되고 구급대원의 신속한 응급처치가 가능하게 된다. 이 서비스는 지난해 현장 배치 1개월 만에 63건의 응급 현장에서 구급대원과 환자를 이어주는 성과를 냈고 역시 올해 9월 말 현재까지 누적 이용 건수가 673건에 달하며 효과를 톡톡히 하고 있다.

모든 게 디지털화되는 세상이라지만 보디랭귀지나 간단한 그림처럼 단순한 게 더 정확하고 빠를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는 세상이다. 실이 꼬인다 한들 저 멀리서 내 목소리를 듣고 응답해주는 종이컵 전화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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