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설희 국립대전현충원 관리과 주무관

11월에는 많은 기념일이 있지만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날이 있으니 바로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날을 모르거나 순국선열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 하고 있다.

순국선열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된 날을 전후로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독립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하신 분들을 의미한다. 또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전하고 위훈을 기리는 법정기념일이다. 1939년 11월 2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제31회 임시총회에서 지청천, 차이석 등 6인의 제안에 따라 을사늑약이 체결된 망국일인 11월 17일을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지정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순국선열을 추모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대전현충원에 잠들어 계신 순국선열 한 분을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1827년 경기도 가평군에서 태어난 조병세 선생은 26세 때 관계에 진출해 사간원 정언, 헌납, 홍문관 교리 등 삼사(三司)(사간원, 홍문관, 사헌부로서 관리의 부정부패를 규찰하거나 임금에게 직언을 하는 직책)의 요직을 역임했다.

1884년 갑신정변부터 1894년 갑오개혁까지 10여 년간 선생은 이조·예조·공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하며 점증하는 외세의 간섭에 맞서 부국강병을 통한 자주적 국권수호에 힘썼다. 그러나 당시 조정의 권력은 민씨 척족세력에 의해 장악당했으며, 선생은 각종 실권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국왕의 자문역할에 그쳐 정책입안에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 했다.

갑오개혁과 을미사변을 거치면서 일본의 국권침탈이 더욱 심화되자 선생은 폐정개혁을 위한 시무19조를 올리는 등 국가의 안위를 걱정했다. 그러나 정국은 외세의 간섭 속에서 자주적 외교노선과 부국강병책을 강구하지 못 했고, 1904년에는 한일협정이 늑결되어 일제가 추천하는 재정·외교 고문관이 한국의 재무·외무관계의 모든 업무를 관장하게 됐다.

조국이 백천간두의 어려움에 처하자 선생은 시폐 5조를 올려 광무황제에게 개혁의 필요성을 간곡히 아뢰었지만 1905년 11월 17일 일제의 강권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말았다. 조약 늑결 소식을 접한 선생은 "나라가 이미 망했으니 내 세신으로서 따라죽음이 마땅하다"는 비장한 각오로 을사5적의 처단과 조약의 무효임을 각국에 밝힐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려 항쟁을 계속했다.

일제 헌병대는 선생을 체포해 일본헌병주재소에 구속하고 이튿날 석방했다. 선생은 석방된 날 다시 상소운동을 전개하려고 했으나 일제 헌병대가 다시 출동해 선생을 교자에 태워 그의 족질인 조민희의 집으로 강제로 끌고 갔다. 이에 조병세는 상소운동마저 할 수 없음을 알고 고종에게 드리는 유소(遺疏)와 국민들에게 보내는 유서 및 각국공사관에 보내는 유서 등 3통을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조병세 선생은 평소 주위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사람이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끝까지 절개를 지키는 일이다. 끝까지 절개를 지켰던 분은 포은 정몽주였다"고 했고 선생 역시 그랬다. 또 ‘나이가 들어가면서 기(氣)가 함께 약해진다면 그것은 혈기(血氣)일 뿐이다. 지기(志氣)는 그렇지 아니하니 나이가 비록 늙어가더라도 지기는 약해지지 않는다’는 소신을 몸소 실천한 분이었다.

과거 없는 미래는 없다.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는 과거 독립을 위하여 희생하신 순국선열 헌신 위에 있는 것이므로 우리 모두는 순국선열의 후손이라 할 수 있다. 다가오는 순국선열의 날 국립대전현충원에 방문하여 순국선열에 대한 추모와 함께 숭고한 뜻을 이어받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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