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윤석 대전을지대병원 산부인과 교수

진료실에 들어와 다리 꼬고 팔짱을 낀 채로 있거나 엄마와 함께 들어와 모녀 사이에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면 십중팔구 생리 불순 환자다. 생리가 2~3년 동안 불규칙해지면서 예민해졌기에 나타나는 자기방어적인 태도다. 이것을 풀어주고 질병을 이해시키는 것이 치료의 시작인데, 상담하는 의사는 큰 부담을 느낀다. 진료가 지체되면서 대기 환자들의 원성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진료 진행 간호사는 발을 동동 구른다.

초경이 시작됐다고 모두가 배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뇌의 시상하부가 성숙돼 성호르몬 분비체계가 갖춰져야 하는데, 이것이 불충분하면 결국 배란이 안 되는 다낭성 난소 증후군이 생긴다. 요즘 여성 10명 중 1명이 이런 호르몬 불균형으로 고생한다.

인간은 어째서 지금의 인간다운 특징을 가졌을까? 20세기 초만 해도 인간은 큰 뇌를 가졌기에 독특한 진화를 거쳤다고 보았다. 하지만 큰 뇌보다 직립 보행이 먼저였다. 직립보행으로 두 손이 자유로워지고 도구를 사용하면서 뇌가 커졌다. 또 하나의 미스터리는 은폐된 배란이다. 대부분의 생명체는 특정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배란을 하고 짝짓기를 한다. 토끼는 번식기라도 짝짓기가 없으면 배란하지 않고 난자를 깐깐하게 지킨다. 하지만 인간은 매달 배란을 한다. 그것도 숨기면서 말이다. 난소에 저장된 난포를 매달 최대 7500개씩 꺼내 에스트로겐을 만들고 난포를 키운다. 그중 하나만 배란이 되는데, 이렇게 난포를 펑펑 쓰니 나이 50세 이상이 되면 남아도는 난포는 하나도 없다. 이것이 폐경이다.

인간은 왜 난포를 낭비하는 은폐된 배란을 하는 것일까? 난소에서 에스트로겐을 매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발로 걸으면서 두뇌가 커졌다면, 은폐된 배란으로 매일 생산되는 에스트로겐이 인간의 뇌를 더 똑똑하게 만든다. 털복숭이 인류에서 멋진 피부를 가진, 어린아이의 모습(동안)을 유지한 채 나이 드는 유형성숙도 은폐된 배란의 힘이다.

다낭성 난소 증후군 유전자는 당뇨 유전자처럼 5~6만 년 전 굶주림이 만연했던 고대 인류에게는 생존에 도움이 됐지만, 먹을 것이 풍부해진 현대인에게는 질병으로 다가온다. 특히 한참을 뛰어놀고 심신을 단련해야 할 사춘기에 공부에 올인하면서 스트레스를 달고 산다면 배란을 할 여유가 없게 된다. 이것이 다낭성 난소 증후군인데, 남성 호르몬이 에스트로겐 자리를 차지하면서 털이 많아지고 비만도 생기며, 인슐린 작동이 안 되면서 만성 피로에 시달린다.

의사가 할 일은 없다. 합병증이 생기면 치료할 뿐, 환자가 스스로 의사가 돼야 한다. 고대인처럼 적당히 먹고, 뛰고 놀면서 스트레스를 날려 보내는 생활을 하면 저절로 배란이 되기 때문이다. 의사의 간섭(intervention)은 한계를 넘을 때뿐, 6개월마다 만나는 환자를 그저 지켜볼 뿐이다. 고혈압 당뇨 고지혈과 같은 모든 성인병도 그렇듯 다낭성 난소 증후군 환자에게 이런 격려를 보낸다. “환자분 어떻게 지내셨어요? 운동을 잘하시고 계시네요. 참 대단해요. 의사가 다됐네요.” 2~3년간 그렇게 하는데, 이것이 치료의 시작이자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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