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산 전경. 충남 아산시 제공
설화산 전경. 충남 아산시 제공

[충청투데이 이심건 기자]설화산(雪花山)은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와 배방읍 중리, 아산시 좌부동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447.5m이다.

이른 가을부터 늦은 봄까지 눈이 덮여 장관을 이룬다고 해서 설화산이라 불렸다. 옛 이름은 서달산(西達山)이나 설아산(雪牙山)이라고도 한다.

산모양이 붓끝처럼 생겨 ‘문필봉’이라고도 하는데 그 기세가 매우 영특하고 장관이므로 이 산이 비치는 곳에는 훌륭한 인물이 난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실제로 이곳에서 많은 문필가가 배출됐다.

또 칠승팔장(七丞八將 : 7정승, 8장군) 지지의 명당이 있는 산이라고 한다.

설화산은 산 모양이 뾰족하기가 마치 촛불 같고 그 봉우리가 다섯 봉이라 오봉산이라고도 한다.

설화산의 동서 양쪽 산기슭에는 외암리 민속 마을과 중리 맹사성 고택이 있다. 맹사성의 어머니는 맹사성을 낳기 전 설화산이 입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고 전해진다.

설화산 자락에 있는 외암리에서도 조선시대 성리학자 외암 이간 선생을 비롯해 많은 대학자가 배출됐다.

역사와 문화가 함께 살아있는 우리 지역의 명산 중의 명산이며 송악면 소재지 방향에서 보면 독수리가 비상을 시작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금북정맥 줄기에서 가지 친 설화산은 남쪽으로 천안 광덕산(699.3m)과 맥을 같이 한다.

설화산 서쪽과 동쪽 기슭은 풍수지리상 길지로 알려져 고려 말부터 반가(班家)의 고택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동남쪽 기슭에는 조선조 청백리인 맹사성 집안이 살던 고택이 있고, 서남쪽 기슭에는 조선조 명조(1545~1567) 때부터 예안 이씨들이 세거지(世居地)로 살았다.

설화산에는 과거에 많은 금광이 있었으나 지금은 폐광이 됐고, 대신 양질의 화강암이 나와 채석장이 있다.

설화산 정상. 충남 아산시 제공
설화산 정상. 충남 아산시 제공

◆ 역사적 인물 및 사건

▲ 맹사성은 1360년 지금의 충남 아산시 배방읍 행단길 25에서 태어났다. 맹사성의 어머니는 맹사성을 낳기 전 설화산이 입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설화산을 뒤로 하는 그의 고택은 고려 말 충신이던 최영 장군이 손자사위 맹사성을 위해 지어 준 집으로 유명한데, 정면 4칸, 측면 3칸의 ㄷ자형 맞배지붕 집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아 사적 109호로 지정됐다. 함께 있는 맹사성 유물전시관은 중요민속자료 225호로 지정돼 있다. 마당에는 맹사성이 직접 심은 수령 600년 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 설화산(雪華山)은 문필봉(文筆峰)이라 해 마을의 웬만한 사람이면 예로부터 글씨 잘 쓰는 문인이 나기로 유명했다.

식수가 전국 제일 유명해 일제강점기 때 일왕이 물을 일본까지 가져다 먹었다 한다.

▲ 아산에서는 1950년 9월 ~ 1951년 1월 인민군 점령 시기 인민군에게 협조했다는 혐의와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배방읍 등 5곳에서 민간인 800명 정도가 적법한 절차 없이 학살된 ‘아산 부역 혐의 희생 사건’이 발생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학살에는 온양경찰서와 경찰의 지시를 받은 대한청년단·태극동맹 등 우익단체가 동원됐다. 이들은 주민을 총살한 뒤 불태워 구덩이에 매장한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 발굴 공동조사단’(유해발굴단) 관계자 9명과 유족 2명이 설화산 자락에서 한국전쟁 당시 온양경찰서(현 아산경찰서)와 우익단체 등에 의해 인민군 부역 혐의로 학살된 마을 주민들의 유해를 발굴했다.

약 50여 구의 유해가 발견됐고, 이 중 2∼4세로 추정되는 아이의 유해도 10여 구 확인됐다. 엄마의 등에 업혀 있는 채로 매장된 아이의 유해가 확인된 것을 볼 때 당시 무차별적인 학살이 자행됐음을 알 수 있었다. 당시 배방읍에서만 300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맹씨행단. 충남 아산시 제공
맹씨행단. 충남 아산시 제공

◆ 문화유산

▲ 맹씨행단

‘맹씨행단’(孟氏杏壇)이란 말 그대로 ‘맹 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이 있는 집’이란 뜻이다.

조선 초의 명정승 고불(古弗)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의 옛집을 부르는 이름이며, 우리나라 살림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옛 모습을 간직한 곳으로 사적이다.

본래 고려 말의 최영(崔瑩, 1316~1388) 장군이 살던 집인데, 맹사성이 다섯 살 때쯤에 아버지 맹희도가 온양에 정착하며 최영의 이웃이 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늠름했던 맹사성의 사람됨을 눈여겨본 최영이 그를 손녀사위로 삼고 집까지 물려준 것이다. 이러한 내력을 볼 때 이 집이 처음 지어진 연대는 14세기 중엽으로도 추측된다. 기록으로 성종 13년(1482), 인조 10년(1632)에 안채가 크게 중수됐다고 하며 집의 방향도 “처음에는 손좌(巽坐, 손방을 등진 좌)로 있었으나 개수한 뒤로는 계향(癸向, 곧 북향)이 되었다”라고 한다.

지금 모습은 처음 지었을 때와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람이 살던 때와도 많이 달라 적어도 서너 번은 구조가 바뀌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근대에 들어서는 1929년에 한 번 중수하고 1970년에 다시 크게 중수했다.

▲ 외암민속마을

설화산을 배산으로 하고 남서로 흘러내린 산줄기의 남서향에 있는 곳에 기와집과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커다란 마을을 이루고 사는 아산의 민속 마을 외암(外巖)마을이 자리한다. 설화산을 등지고 반대편에 있는 맹사성(孟思誠) 고택이 있는 중리(中里)마을과 함께 약 500년 전에 형성됐다고 전해진다. 이 마을은 애초에 강 씨와 목씨 등이 정착해 마을을 이루었다가, 조선 명종(明宗) 때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예안이씨의 이정(李挺)이 이주해 오면서 본격적으로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안동 풍산의 충효당(忠孝堂)에서 태어난 자손 중 막내아들이 외암마을로 오면서 예안이씨는 이 마을 사대부가의 중심을 이루었다. 이후 외암마을은 예안이씨의 씨족 마을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이후에도 후손들이 번창하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외암마을은 점차 양반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마을 이름은 이정의 6대손인 이간(李柬)의 호를 따서 ‘외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예안이씨 사대부가의 기와집과 마을 주위의 논과 밭에 면한 곳에는 양반집에 소작을 붙여 살던 초가집들이 잘 조화를 이루며 자리하고 있다.

▲ 오봉사(대웅전, 삼층석탑)

오봉사 경내에 있는 삼 층 석탑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웅전 앞 석축 아래에 있으며 석탑의 기초가 없어 다른 장소에서 옮겨진 것으로 추측된다. 새로 마련한 화강암 대석위에 안상이 새겨진 하층 기단이 있고, 그 위에 상대중석과 상대갑석이 있다. 3층의 탑신과 옥개석이 있으며 옥개석 위쪽의 상륜부는 없어졌고 상대갑석의 옥신괴임이 매우 높게 조성돼 있다. 옥신괴임과 1층 옥신의 크기가 맞지 않아 서로 다른 부재를 맞춘 듯하며 옥개석이 매우 두꺼우며 옥개석의 형태를 통해 고려시대 석탑으로 추정됐다.

아산 용화사(설화산) 석조여래입상. 충남 아산시 제공
아산 용화사(설화산) 석조여래입상. 충남 아산시 제공

▲ 아산 용화사(설화산) 석조여래입상

제작 당시 원형이 잘 남아 있는 충남지역의 고려시대 대표적인 석불 중 하나로 2013년 2월 12일 충남 유형문화재 제220호 지정됐다.

고려시대 석불이며 하나의 화강석으로 조성했고 높이는 약 270㎝이다. 용화사(龍華寺)가 있는 곳은 아주 오랫동안 폐사지로 남아 있었고 유일하게 고려시대 석불인 아산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던 곳이다. 1947년 아산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이 있는 자리에 월산이 조부의 지원을 받아 용화사를 창건했다. 공덕비에 월산은 비구니라고 하였지만 결혼한 여승이어서 흔히 보살이라 했다. ‘용화사’라는 절 이름은 아산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이 흔히 미륵불로 불리었기 때문에 미륵신앙에서 제시되는 미륵 정토를 용화세계라고 하는 것에서 비롯됐을 것으로 본다. 이후 대처승인 법성이 주지를 맡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 송암사 석불(고려시대 석불)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송암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불. 송암사 석조보살입상은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2018년 6월 4일 아산시 향토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2019년 1월 30일 충청남도 문화재로 지정 예고되었다. 2020년 9월 10일 "아산 송암사 석조여래입상"이란 이름으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25호로 지정되었다.

외암마을 돌담길. 충남 아산시 제공
외암마을 돌담길. 충남 아산시 제공

◆ 설화

충남(忠南) 아산시(牙山市) 배방읍(排芳邑)에서 설화산의 지명에 관련된 전설이다.

설화산에는 만공체라 해 활 쏘는 신이 지키고 있어 도둑질하지도 못했으며 설사 했더라도 성공하지를 못했다고 한다.

국가에 큰일이 있으려면 설화산(雪華山)이 지진도 아니고 뭔가 무너지는 소리도 아닌 소리를 내며 운다고 전해진다.

몇 년 전 설화산(雪華山)이 울더니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사건이 나타나기도 했고, 6·25 때나 한일합방 때에도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울었다고 한다.

어느 땐가 중국의 유명한 기관이 그 당시 유명한 설화산에 와 보고는 7승 8장 즉 일곱의 정승과 여덟의 장수를 낼 지세를 타고났다고 말하면서 설화산(雪華山) 꼭대기에 있는 옥초초전지라는 큰 연못 자리에 시체를 묻으면 대대로 정승이 난다고 했다.

당시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묫자리를 찾고 있던 사람들은 그 명당자리를 묫자리로 쓰려고 했으나 중국 기관이 장군 후세가 길이 빛날 명장이었으나 전쟁터에서 너무나 많은 살생을 했기 때문에 그 자리는 장군에게 맞지 않는다고 했다.

그 뒤로 사람들은 설화산(雪華山)의 그 명당자리를 탐내 시체를 몰래 투쟁했다. 그날부터 그 연못의 맑은 물이 뒤집히고 개들이 설화산(雪華山)을 향해 으르렁거렸고 날이 가물어 몇 달을 두고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잦은 굿을 하고 지성을 드렸으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허름한 스님이 동네를 지나면서 "비가 안 오는 것은 시체가 묻혔기 때문이니라"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동네 사람들은 시체를 파서 다른 곳으로 옮기니 그때부터 억수같이 쏟아져 가뭄을 면했다. 그 뒤로 비가 안 오면 설화산 꼭대기에 올라가 땅을 파면 비가 내린다고 한다.

하늘에서 본 설화산. 충남 아산시 제공
하늘에서 본 설화산. 충남 아산시 제공

◆ 추천코스

 1 코스 : 송악 당림미술관 - 설화산 (2.2km, 약 1시간 30분)

 2 코스 : 좌부동 초원아파트 - 갈림길 - 설화산 (2.2km, 약 1시간 30분)

3 코스 : 맹사성고택 - 설화산 (1.7km, 약 1시간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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