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우 배재대학교 문화예술대학 학장

주말인 오늘 홀로 연구실에 있다. 나의 작업에 대해 고민하다가 지나온 그림 세계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림이란 그냥 큰 생각 없이도 나를 표현하는 하나의 도구로써 잠자고 있는 상상력을 깨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림을 그려온지 벌써 40년이 넘었다. 부끄러운 숫자인데 그 부끄러움은 결국 나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고, 나의 표현에 족쇄가 되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면 교수와 그림 하는 화가 사이에서 존재하는 예술적 도덕성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마음이었을까? 나는 원초적으로 캔버스에 다가갔다.

마치 알몸이 되어 순수하게 만나서 의식을 치르듯 물감과 일체감을 느끼면서 휘갈겼고 그 안에서 알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마치 라비도 상태로 몰고 가는 시늉의 그림을 그리나 싶을 만큼 나는 근원적인 내 모습과 만났다.

지금까지 그려온 그림들에서 조금은 근원적인 자유로움을 느끼면서 말이다.

관람하는 이 입장에서 호평과 혹평이 함께 하겠지만 그림 하는 사람으로서 타는 목마름으로, 갈증으로 토해내는 그림이 그림 변화를 이루고 실험적으로 관람객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살바도르 달리 화집을 보다가 순식간에 그림 한 점을 그려내는 나인데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데도 작가는 전시로 내 놓는다.

그림은 이래서 그만두지 못하는 것일까? 전시를 앞두고 계획하면서 떠올린 단어들….

크게 의미는 없지만 힘든 고비들이 고개를 숙이는 나만의 수행이거늘 그림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은 아이러니 하게도 쉽지 않은 수행 길 같은 길이다.

인생의 후반기를 준비하고 가야 하는 시기가 왔다. 그림 인생도 교수 생활도 내 인생의 나이도 말이다. 나는 이제 어떻게 살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세상 욕심 다 내려놓고 서서히 잊혀 져 가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마음이 가난한 자를 위로해 주는 그림을 그리면서 인생 후반의 그림 인생을 살아낼 수 있을까?

그래도 별 수 없는, 고작 나 자신을 위하여 처절한 사투와 서러운 눈물로 지켜낸 나 자신을 위한 그림을 그려갈 용기가 있나 말이다.

장마가 시작 되려나 보다. 내 이름에 비우(雨)가 들어있어서 일까? 나는 비를 좋아한다.

오늘도 그날처럼 비가 내린다. 내 어머니와 거닐었던 그 길에 가서 인생 후반기를 걸어가는 아들의 서러운 개인 전시를 보실 수 있도록 목 놓아 어머니 품에서 울고 싶다. 누군가로부터 꽃을 선물 받지만 가끔은 꽃을 보면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에 꽃이 나를 만나 슬퍼지고 비처럼 울게 될까봐 차라리 꽃을 그린다.

질리지 않을 꽃의 진심으로 간직하고픈 마음으로 그린다.

꽃은 사람의 마음을 사는 데는 부족함이 없는 것처럼 서러운 아들의 꽃을, 꽃그림을 마음으로 나마 어머니에게 안기고 오는 7월 1일부터 있을 개인전을 시작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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