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투데이 김윤주 기자] ☞연예인이 친숙한 경우가 종종 있다. 실제론 알지 못해도 ‘내적 친밀감’이 생긴다. 그중 가장 으뜸은 송해 선생님이다(표기상 송해로 통일). 그는 1988년부터 ‘전국 노래자랑’ MC를 맡아 근 35년간 진행했다. 전국 노래자랑을 안 본 사람은 없기에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만인의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었다. 그의 건강 악화 소식에 모두가 쾌유를 바랄 정도였다. 그냥 늘 건강하셨으면 좋겠던 분이었다. 그러던 중 송해의 별세 소식이 들려왔다. 큰 할아버지를 잃은 듯 마음이 아프다.

☞그는 곧 전설이었다. 그건 그가 걸어온 시간이 증명했다. 세계 최고령 MC 이자 국내 최장수 MC다. 송해는 올해 95세 최고령 진행자로 기네스북에까지 등재됐다. 국내 단일 TV 프로그램 ‘연속 진행’ 최장수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그는 자타 공인 ‘일요일의 남자’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일요일 하면 ‘전국 노래자랑’이었고 ‘전국 노래자랑’ 하면 송해였다. 진행 실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돌발 상황에서도 관록이 빛났고 재치가 넘쳤다. 가수 출신인지라 노래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푸근함이 느껴졌다.

☞그는 자기관리의 끝판왕이었다. 건강을 위해 참 많이도 걸었다. 심지어 자신의 건강 비결은 ‘BMW(버스·지하철·도보)’라 밝히기도 했다. 또 매일 오후 4시에 동네 목욕탕을 습관처럼 갔다. ‘전국 노래자랑’ 때도 녹화 전 날 현장에 도착해 그 지역 목욕탕을 찾곤 했다. 그러면서 지역 주민들과 소통했다. 그는 ‘건치’로도 유명했다. 놀랍게도 그 연세에 임플란트 하나 없었다. 그 비결로 치과를 자주 방문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소탈의 대명사’였다. 2000원 우거지 국밥집(지금은 2500원)을 이용하고 4000원 이발소를 이용했다. 그러면서 늘 사람들과 함께했다.

☞그의 인생은 ‘딩동댕’이었다. 따뜻한 미소를 가진 그에게도 견디기 힘든 시련들이 있었다. 송해는 실향민이었다. 6·25 전쟁 당시 월남했다. 그래서인지 이북에 있는 가족들을 늘 그리워했다. 황해도에서 전국 노래자랑 녹화를 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환갑 무렵, 외아들을 오토바이 사고로 잃었다. 이후 송해는 아들의 사고 장소인 한남대교를 가지 못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런 아픔을 딛고 전국 노래자랑 진행을 맡아 국민들과 호흡했다. 그리고 끊임없는 기부와 선행을 실천했다. 그는 생전 "‘땡’을 받아보지 못하면 ‘딩동댕’의 정의를 모른다. 나 역시 내 인생이 ‘딩동댕’이라는 것을 남기고 싶었다"라고 말했었다. 어쩌면 그는 ‘땡’ 같은 시련이 오면 나눔을 통해 ‘딩동댕’으로 바꿨던 게 아닐까. 언제나 따뜻했던 우리 큰 할아버지의 명복을 빈다. 그립던 가족들을 만나 ‘천국’ 노래자랑을 즐기시길…

김윤주 편집팀장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