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석 국회부의장

여기는 도쿄 제국(帝國) 호텔.

4박 5일의 일정을 마친 4월 28일 이른 새벽이다. 밤새 잠을 못이루고 뒤척였다. 창을 여니 서울보다 습기가 좀 있고, 미세먼지는 느껴지지 않는다. 충청투데이 칼럼을 쓰기 위해 앉았다. 마감 시한에 몰려야 글이 써지는 건, 15년 기자생활을 한 나의 나쁜 버릇이다. 기고문을 쓰기 위해 틈틈이 적어 둔 메모들을 펼쳐 놓았다.

한일(韓日) 양국의 역사는 오욕(汚辱)과 영광(榮光)을 씨줄과 날줄로 얽어 짠 하나의 양탄자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1868년)을 통해 추구한 것은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 선진국으로 진입한다)였다. 일본은 30년만에 청나라와 러시아를 무력으로 제압했다. 러일전쟁(1904~1905)에서 승리한 일본은 곧바로 조선의 국권을 찬탈했다.

어제 오후 일본 의회의 의원회관에서 아베 전 총리를 만났다. 아베 총리는 일본 우익의 거두(巨頭)다. 요시다 쇼인-다카스키 신사쿠-이토 히로부미-기시 노부스케로 이어져 온 조오슈 번의 적장자이다. 아베 총리의 고향 할아버지들이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다.

아베 총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안부를 물었다. 아베 총리는 2015년 박근혜 대통령과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합의를 도출했다. 자연히 종군 위안부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아베 총리는 ‘국가간 합의는 존중돼야 한다’고 했고, 나는 ‘역사는 지워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아베 총리는 헤어지면서 "(한일관계가)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덕담(德談)을 남겼다.

지난 5일동안 만나고 싶은 일본측 인사는 다 만났다. 기시다 총리, 하야시 외무장관, 하기우다 경제산업장관, 기시 방위대신, 청와대 안보실장 격인 아키바 NSS국장…

한일 국교정상화(1965년) 이후 최악의 상황인 한일관계를 새롭게 시작하자, 윤석열 신정부 출범을 모멘텀으로 삼자,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나는 일본 쪽의 기대와 열의를 충분히 확인했다.

모리 전 총리는 한일의원연맹 일본측 회장을 맡고 있을 때, 서울과 부산에서 공식 스모대회를 개최했던 일화를 떠올렸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이 한일관계가 좋았던 시절이었다"고.

우리 법원이 징용공 배상을 위해 압류한 한국내 일본기업 자산의 현금화, 한일 위안부 합의 같은 쟁점들에 대해 일본측은 유감스럽다는 원론적 입장을 재확인했다. 나는 이렇게 설득했다.

"아픈 상처의 역사에서 비롯된 문제들이다.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한일 양국의 합의정신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과거사 갈등은 무역분쟁과는 다른 것이다"

한일 관계를 김대중 오부치 선언 2.0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윤석열 당선자의 의지는 확고하다. 일본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고 있다.

이번 한일 정책협의단이 국민들께 드리는 보고서를 한 줄로 요약한다.

‘어둡고 길었던 터널의 끝에 불빛이 보인다. 밝은 불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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