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범 충남지식재산센터장

▲ 이인범 충남지식재산센터장
▲ 이인범 충남지식재산센터장

‘형수’는 형의 아내이다. 나이든 남성들에게 형수는 어머니 다음으로 기대고 정 붙였던 여성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결혼 전에는 반은 부모였다. 필자의 어머니는 삼남 사녀의 집안에 맏며느리로 시집와 시부모를 모시고 학교 다니는 시동생 2명을 거두셨다. 특히 어머니는 두 시동생을 친 동생처럼 아끼셨는데 식사와 빨래는 물론이고 학교 가기 싫어하면 책보(책을 보지기에 쌈)와 도시락을 싸서 주고 학교 보내셨다. 순성초교를 큰언니 자녀들과 같이 다녔기 때문에 공부는 잘하는지. 학교생활은 잘하는지 조카에게 묻곤 하셨다. 두 시동생은 장성하여 서울에서 사업을 하였건만 모두 실패하였다. 종종 아버지가 애써 키우신 소도 팔아가고 땅도 팔아갔다. 그때마다 삼촌들은 “제가 돈 많이 벌어서 형수님 호강시켜드릴게요”를 잊지 않았다. 기우는 집안에 빚이 없을 수 없다. 형편이 기울어지자 우리 부모님은 날품을 팔아 우리 5남매 학교를 보내셨다. 그러면서도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셨다. 이런 형수가 어디 우리 어머니뿐이랴.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형수 손에 커서 형수님을 어머니처럼 모시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마치 송나라 때 포증(포청천)이 자신을 키워준 형수를 어머니로 모신 것처럼 말이다.

필자는 5남매의 맞이니 형수도 없다. 그런데 나이든 이 마당에 형수님이 한 분 생겨났다. 3년 전쯤에 당진에서 사업했다는 분이 우리 동네에 새집을 지었다. 알고 보니 중학교 선배셨다. 하룻저녁 그 선배와 소주잔을 기울이고는 금세 친해졌다. 그 선배님의 부인은 갸름한 얼굴의 미인형으로 사리판단이 분명하시고 검소하시다. 위트도 있으시고 강단도 있으시다. 지금도 시동생 내외에게 일을 주고 생계를 돕고 있다. 늘 찾아오는 손님도 많건만 직접 차를 끓여 주시고 밥을 손수 지어 대접한다. 그것이 미안하여 한번은 시내 식당으로 모셨다. 겉절이를 덜다가 국물이 손에 튀었는데 손가락을 빠는 모습이 너무도 존경스러웠고 옛날 어머니의 모습이 데자뷔 되어 가슴이 먹먹하였다. 선배는 자기 방을 장작 때는 온돌을 넣고 바닥은 한지에 기름을 먹여 발라 옛날 사랑방을 만들었다. 선배는 가마솥에 헛개나무를 삶고 형수님은 그 방에 콩나물시루를 얹어놓고 콩나물을 기르신다. ‘부자의 질박한 삶이란 이런 것인가.’ 감동으로 다가왔다. 선배와 소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형수님은 같이 말을 거들면서도 재빠른 손놀림으로 콩나물을 다듬으신다. 그런 모습이 또 한 번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였다. 형수님은 젊어서부터 몸 부서지게 일을 하셔서 건강이 안 좋으시다. 그게 안쓰러워 집에 가 밥을 먹겠다고 하니 한사코 붙들어 앉히셨다.

지금 시대 모든 형수가 다 이럴 수도 이럴 필요도 없다. 다만 친 형수가 되었건, 선배 형수가 되었건 친근하게 다가가는 풍습은 각자의 행복지수를 한층 더 높이는 무형의 전통자산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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