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석 화백(수묵화가)

고암 이응노는 한국 현대회화사에서 전통을 탈피하여 현대성을 획득한 화가다. 필자에게도 고암의 예술가적 기질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손이 마려워 무엇이든 만지작거려야 직성이 풀리는 실험적인 열성의 작가였다.

최근 이응노 미술관에서는 청관재 소장 고암 작품을 구입, 대규모 전람회를 열고 있다. 고암의 대표작들이 대거 전시된다는 점도 흥미를 끌지만 필자의 눈을 끄는 것은 55년을 전후한 시기의 작품들이다.

청관재 소장 작품 중 55년을 전후한 작품들이 더 없이 소중한 이유는 사생과 사실적 묘사 과정을 거쳐 사의라는 정신적 표현에 이른 작품이라는 점이다. 또 자칫 ‘불온’이라는 잣대가 적용되어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대표작들을 개인의 힘으로 되살려 우리 곁에 돌아오게 했다는 점도 그렇다.

우리 사회에서 1968년부터 1988년까지 이응노 화백은 동백림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 받고 백건우 윤정희 납치 사건과 관련지어지면서 불온한 사건의 연루자로 인식 되었다. 이러한 시류에 편승, 고암의 작품은 화랑가에서 자취를 감췄고 예술 세계에 대한 정보도 차단되었다. 아울러 미술사의 연구 대상도 되지 못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고암의 작품은 상당수 손망실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던 중 1988년 월북 작가 해금과 함께 고암도 풀리게 되고 이듬해 호암미술관에서 이응로 작품전이 개최되었다. 동시에 지하에 숨어 있던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시기 조재진 사장은 고암의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구입했다. 조재진은 명작이 지니는 조건들에 대해 자신만의 기준이 분명했고 안목 또한 탁월했다.

이런 저변에는 유홍준이라는 당대 최고의 감식안을 지닌 미술평론가의 도움이 컸다. 필자는 조재진의 초대로 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를 따라 반포 아파트를 방문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그의 아파트 벽과 방에 가득 찬 고암의 1950년 중후반 득의작들을 보면서 한 사람의 위대한 노력으로 한국현대미술사의 공백을 메워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되었고 마음 속 깊이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나아가 조재진의 고암에 대한 이해, 작품에 대한 해석 그리고 수집 대상 작품에 대한 당위성은 지극히 깊고 견고했다. 미술을 전공으로 하는 필자를 한 없이 부끄럽게 만들었다.

잊을 수 없는 낯선 경험이었다.

고암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그가 한국전통회화의 현대화와 국제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특히 유홍준 교수는 "수묵화의 현대적 조형이 어떻게 가능한가의 좋은 시범을 보았다"고 했고 이태호 교수는 "모든 회화의 영역을 넘나들어 아마도 고암이 유럽에 가지 않았다면 한국 현대 미술사가 그에 의해 구태를 벗는 또 다른 양상으로 전개 되었을 거라 추측해 볼 정도이다"고 했다.

이번에 전시하는 작품의 백미는 1955년을 전후한 작품 군이다. 특히 그의 대표작중 하나인 ‘금강역사’는 그가 말한 바대로 "금강역사는 생동하여 핏기가 도는 면형과 박력 있는 기품은 바로 그것이 신라 선대 민족의 대기백인 양 싶었다"고 언급한 것처럼 현장에서 받은 감동을 특유의 수묵 스케치로 완성한 작품이면서 형상 너머의 정신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또 ‘영차 영차’는 일상에서 소재를 차용한 것으로 시대와 현실에 대한 해석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화첩에 그린 이 작품은 현장에서 속사한 듯 생동감이 넘친다. 색채는 그윽하고 투명하며 격조는 고상하고 독특했다. 1962년 이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설경인물’은 경운기를 운전하는 장면을 그렸다. 단순하고 간결하게 요약된 절제와 결핍의 미학은 소품이지만 대작의 힘이 느껴진다.

‘굴뚝 청소부’는 "고래 뚫어요"라고 외치는 듯 한 시대와 인물의 전형을 흑과 백 그리고 필과 획의 대비와 조화를 통해 극적으로 상승시키고 있다. 인간 생명의 향기를 전달한다. 필자는 청관재 소장품 전을 보면서 고암의 예술 정신 앞에서 한 없이 초라했다.

사실성을 지키면서 사의성을 드높이는 것이 얼마나 예술성을 드높이는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만들었다.

고암은 전통을 깨고 동서를 융합한 전혀 새로운 예술세계를 구축하더니 다시 전통을 통한 새로운 가치로 돌아 온 독특한 여정의 화가이다.

그는 그의 법을 사용했다. 이런 점에서 청관재 소장 고암 작품은 현대회화가 안고 있는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아직 전시회 개최중임에도 공개하지 않은 청관재 소장품이 벌써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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