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호 충남소방본부장

회자정리(會者定離)는 만날 때부터 이미 이별이 정해져 있다는 말이다. 탄생과 죽음, 입학과 졸업, 취업과 퇴직처럼 세상의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니 영원한 것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필자는 학창 시절 자취방부터 시작해 지금의 전셋집까지 열댓 번이나 이사를 했다. 그리고 직장에서는 부서나 근무 기관을 옮기면서 서른 번 가까이 보따리를 쌌다. 그런데 이사를 갈 때마다 매번 동일하게 밀려오는 감정이 있다. 살고 싶어 하던 곳이라면 덜할 수도 있겠지만 경제적인 형편에 맞춰 원하던 곳이 아닌 데로 이사를 하게 되면 소태껍질을 씹은 것처럼 쓰디쓴 감정이 한참 동안 가시지를 않았다. 먼저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싫었던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할 때가 되면 처음 그 느낌은 어디로 가고 떠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고 난 뒤에야 그 가치를 알게 되는 것과 같았다.

정기적인 인사이동이 있는 공직사회에서 12월은 정년 퇴직자들이 수십 년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 한 직장을 떠나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과거와는 달리 최근에는 거의 퇴임식을 하지 않는 분위기인데다 코로나19 때문에 행사를 만들어 석별의 정을 나누는 풍경은 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 퇴임인사를 사내 전자우편에 올려 모두에게 보내는 것으로 대신하게 된다. 필자는 그 퇴직자를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모두 다 읽어보고 있다. 퇴임인사 만큼 가장 소중한 글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퇴임인사는 그 직장에서 단 한 번, 그것도 다시 돌아올 수 없이 영원히 떠날 때 쓰는 글이다. 그 글 속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긴 세월 동안 쌓이고 쌓였던 보람과 회한이 용광로의 쇳물처럼 녹아들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진하고 뜨거운 느낌은 어느 유명 작가의 글에 비해서도 덜하지 않다.

이제 하루만 더 지나면 2021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요 며칠 지난 12개월 동안 충남 소방이 걸어 온 길을 반추해 보았다. 몇 마디 단어로 정리해보니 놀라움, 슬픔, 기쁨, 부끄러움, 화남, 감동 등이 떠올랐다. 그야말로 모든 감정의 집합체였다. 충남의 상황에 맞는 새로운 시책을 개발해 시행하면서 난관에 부딪히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동료들에게 칭찬보다는 질책을 더 많이 했다는 부끄러움과 후회가 밀려왔다. 전국 1위라는 큰 상을 받고 기뻐하는 직원들에게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해준 것이 전부였다. 부드럽고 온화한 리더십의 장점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천하는데 부족했음을 자책하게 된다.

젊었을 때 일부러 유서를 써 본 어떤 이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인생 마지막 글인 유서를 쓰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가장 깊이 생각할 수 있었고 마음 한구석에서 떠나지 않고 있던 사랑과 미움의 정체도 발견했다고 한다. 남기고 갈 것을 찾아보니 미안하고 고마웠다는 두 마디 말밖에 없었기에 쉽게 와닿지 않았던‘공수래 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이치도 깨달았다고 한다. 내일은 종무식과 퇴임자 인사, 멀리 다른 곳으로 근무처를 옮기는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할 것이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마스크 넘어 눈빛으로만 전해야 할 것 같다. 가족, 직장동료, 이웃, 선·후배 그 누가 되었든지 마지막 만남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미운 감정도 봄볕에 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다. 어렵고 힘들 때 마지막을 떠올리면 아픈 마음도 치유될 것 같다는 생각을 12월의 끝자락에서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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