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췌장암과 싸우다 세상을 떠난 유상철 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에 대한 추모가 이어지는 8일 오후 인천시 중구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 마련된 임시분향소에서 유 전 감독의 유니폼을 입은 팬이 조문하고 있다. 연합뉴스

[충청투데이 김윤주 기자]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속에 2002년을 품고 있다. 6월, 한·일 월드컵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 기억은 그만큼 뜨겁고 강렬하다. 모든 기록은 최초이자 최고였다. 아시아 최초 월드컵이었다. 21세기 첫 월드컵이었다. 공동 개최도 처음이었다. 우리나라는 4위를 하며 최고 성적을 냈다. 그야말로 전성기였다. 그래서 2002년은 더 잊을 수 없다. 거리마다 붉은 물결이었다. 모두가 붉은 악마였다. 응원은 일상이었다. 지금도 박수 다섯 번을 치면 몸이 저절로 반응한다. 우린 하나였다.

☞태극전사는 영웅이었다. 물론, 그 중심엔 히딩크 감독이 있었다. 그의 전술은 다시 봐도 전설이다. 그리고 그걸 구현해낸 선수들의 기량도 대단했다. 모두가 잘했고 잘 싸웠다. 그래서인지 다 멋있었다. 물론 성적이 좋았기에 필터 효과가 있었다. 그들은 중학생이던 날 축구에 빠지게 만들었다. 매일 선수 등번호를 외웠다. 방과후 친구들과 플래카드를 만들기도 했다.

☞유상철의 등번호는 ‘6번’이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육상철’이라 불렀다. 그는 2002 월드컵에서 기억에 남는 선수였다. 그가 폴란드전 후반에 날렸던 중거리슛은 정말 잊을 수 없다. 전반전 황선홍 골에 이은 쐐기골이었다. 이 골은 결국 한국이 월드컵 역사상(본선) 첫 승리를 가져오게 했다. 당시 그는 해외 전문가에게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최고”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유상철은 월드컵 외에서도 빛이 났다. 특히 그가 프로선수를 시작했던 울산 현대에선 정신적 지주로 통했다. 한국뿐만이 아니다. 그는 일본 J리그에서도 득점왕으로 활약했다. 지도자로서도 대전·전남·인천축구팀을 이끌며 큰 족적을 남겼다.

☞그랬던 그가 떠났다. 췌장암 투병 끝에 7일 별세했다. 병마를 이겨내겠다던 약속은 결국 못지키게 됐다. 그는 정말 강한 선수였다. 선수 시절, 한쪽 눈이 실명되고도 12년간 124경기에서 뛰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이겨낼 줄 알았다.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기에 더 애달프다. 천진난만한 영정 사진도 안타깝기만 하다. 6번인 그는 우리에게 6월을 각인시키고 6월에 떠났다. 여전히 19년전 6월이 생생한데, 그는 너무 서둘러 별이 됐다. 더이상 그를 볼 순 없지만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영원한 유비 6번 유상철, 하늘에선 맘껏 축구할 수 있길 바란다. 김윤주 편집팀장 maybe0412@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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