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홍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교수

귀여운 고양이로만 기억되는 정다빈이 죽었다. 내 아들과 동갑인데 안타깝다. 아내에게 정양의 부음을 물었다. 침술에 빠져 TV를 잘 안보는 아내지만 알고 있었다.

아내는 눈물이 난다고 하면서 그 죽는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고 했다. 심각하리 만큼 죽음의 충동을 느낀 적이 있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는데 아내는 예전에 자살 충동에 매일 사로잡혀 살았다고 답한다.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좀 심하다 싶었지만 그럴만한 내 과거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군에서 제대할 무렵 갑자기 양친을 여의고 어린 동생 넷과 함께 스무 번 정도 이삿짐을 쌌던 기억들 사이에 수없는 죽음의 유혹을 간직하고 있다. 당시 나는 경제적 파탄에 이어 삶의 근본이랄 수 있는 화가로서의 존재확인마저 불가능한 상태였는데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죽음이었고 매일 이어지는 폭음은 그 지연책이었다.

술은 어느 날 청계천변의 헌책방을 기웃거리다가 만난 펄벅의 '설날'이란 영문판 다이제스트로 대체되었다. 한 미군 병사가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전장의 공포와 이국 동토의 추위를 이기기 위해 한 여인을 만나고 크리스토퍼란 혼혈 사생아를 남긴 채 돌아간 후 버려진 자들의 고통스런 삶들을 담은 소설이었다.

펄벅이 소상히 그린 이 땅의 모습과 동두천, 김순아, 반도호텔 같은 친숙한 이름에 끌려 매일 읽었다. 아니 작은 틈만 보여도 여지없이 파고드는 삶의 고통을 이기려 눈뜨면서부터 잠들 때까지 미친 듯 영어에 매달렸다. 펄벅은 전쟁고아뿐 아니라 내게도 은인이다.

이무렵 아내를 만나 안정을 찾게 되었지만 아내는 빚투성이 내게 속은 꼴이어서 10년 동안 듣도 못한 빚을 갚아야 했다. 과묵한 아내는 불평없이 내가 짊어졌던 짐을 대신 지고 가정을 지켜 주었으니 진정 은인이다. 그 후 대학에 몸담게 되고 그녀에 대한 물심양면의 빚도 어느 정도는 탕감되었으리라 위안하면서 성실하게 살려고 지금껏 노력해 왔다.

이야기가 너무 빗나갔다. 아내가 자살 충동에 빠진 것은 실은 최근이라고 했다. 나로서는 충격이었지만 아내는 이젠 털어 놓을 수 있다고 했다. 미술 분야도 국내에 박사과정이 개설되면서 내게도 10여 년 전 늦깎기 공부를 할 기회가 찾아와 젊은이들과 함께 가는 길에서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살았다. 교수로서의 자질에 결핍을 느끼던 시절 자기투자로서 이보다 값진 것이 있을까 싶어 비판철학, 현상학, 해석학,? 매체철학, 해체론 등 신비한 학문에 몰두했다.

일주일 내내 연구실에서 침식을 해결해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고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스스로 자만하기도 했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둡다고 어두운 집에 버려진 아내는 그 시간에 자살충동에 사로 잡혀 있었던 것이다. 성공한 남편과 장성한 자식들은 그녀에겐 남이었으니 내 공부는 완전 헛공부였다.

아내는 6년 전 즈음 침구(鍼灸)공부를 시작했는데 그것은 탈출구였다. 지금까지도 그 오묘함에 혼신을 다하고 있는데 듣고 보니 그것은 죽음충동을 극복하고자 한 노력이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의 지적대로 인간에게 잠재되어 있는 죽음 충동은 그것이 외부를 향할 때 공격성이 되고 자신의 존재를 향하면 자살이 된다고 한다. 해체의 이 시대에 실존들은 스스로 존재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제 삶의 방향도 성공신화의 스펙타클을 부추기고 또 쫓아가기보다는 오히려 비움을 통한 충만함(mindfullness)으로 회귀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스펙타클이란 장관(壯觀)을 말하지만 그 어원대로 허깨비일 뿐이다. 그것만이 죽음충동 뿐 아니라 타자에 대한 공격성을 거둬들인 온전한 존재들의 삶의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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