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규 대전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처장

정해년(丁亥年), 새해가 밝았다.

특별히 올해는 '황금돼지의 해'로 신생아는 부자가 된다고 하고 예년보다 가정의 살림살이가 넉넉해질 것이라도 한다.

어쩌면 그러한 말들은 현실의 우리 경제 형편을 자조적으로나마 위로하기 위한 발상이 아닌가 싶어 씁쓸한 생각도 든다.

그런데 혹 어두운 전망에 젖어 지난 한해 동안 우리는 실제보다 더욱 심각하게 '힘들다', '어렵다'라는 말을 많이 하고 또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던 건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 은연 중에 남을 위한, 훨씬 절박한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을 거두는 것을 합리화하지는 않았는가.

'내가 어려운데 누굴 도와…', '나도 살기 힘들어 죽겠는데 남을 어떻게 챙겨…'.

자선을 촉구하는 단체나 광고를 접할 때마다 혹시 그런 말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젊은 시절 정신대로 끌려갔다가 상처뿐인 몸과 마음으로 돌아와 남은 생을 낙이라곤 모르고 사셨던 김모 할머니가 그래도 세상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임종 전까지 두번에 걸쳐 1억 원에 가까운 돈을 한 자선 단체에 기부했다는 사실은 그러한 우리의 합리화를 무색하게 만든다.

김 할머니는 생전에 '이 세상에 나누지 못할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진정한 기부(寄附)는 스스로 풍족할 때만이 아니라 아주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을 영위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는 가슴 아프고도 훈훈한 이야기다.

얼마 전 퇴근길에 라디오에서 구세군 봉사자로 일하는 한 여성의 인터뷰를 들었다.

"원래 전에도 가끔씩 봉사활동에 참여하곤 했었는데 이제는 늘 봉사할 수 있어 참 기뻐요. 추운 날에는 정말 3시간만 서 있어도 다리에 감각이 없어질 정도로 힘들기도 하지만 이렇게 어려운 때에도 기부 금액이 줄지 않는 것을 보면 세상은 아직 따뜻한 것 같아요."

비록 사회 통념적 잣대로 보아 크게 성공하지도 못했고 부유하지도 못하지만 세상과 자신의 활동에 대한 신뢰와 사랑으로 가득한 그 여성의 말을 듣고 나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여성에 비해 나는 참으로 많은 것을 가졌으나 사람들에 대한 무모할 정도의 저런 따뜻한 신뢰를 언제부턴가 잃고 살아 왔던 것 같아서였다.

'남을 위한 내놓음'의 바탕이 바로 그런 마음이어야 하지 않을까.

사람에 대한 신뢰, 남을 위한 일을 행복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 그리고 결국에는 그것이 '남을 위한' 것이라는 자체를 잊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되는 마음.

말처럼 쉽지 않은 경지임을 안다. 그건 천사들이나 먹을 수 있는 마음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자. 살아있는 천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김 할머니도, 구세군 봉사자도, 아이스크림 먹고 싶은 것을 참고 모은 동전들을 사랑의 열매 모금으로 기탁하는 고사리 손들도 모두 천사가 아닌가.

방법을 몰라서, 돈이 너무 적어서라는 말은 이젠 핑계다.

봉사나 기부의 루트는 주위에 얼마든지 많으며 TV·인터넷을 조금이라도 접하는 사람이라면 그 열린 방법을 찾기란 너무 쉽다.

또 정말 마음이 있다면 관련 기관에 문의를 해도 될 것이다.

적은 액수를 주저하다가는 평생 단 한 번의 기부도 하지 못하게 될 지 모른다.

꼭 돈이 아니어도 될 것이다. 돈보다 일손을, 마음을 필요로 하는 자선단체들이 얼마나 많은가.

올 한 해 다들 정말 돼지처럼 부자가 되기를 바란다.

통장 잔고나 주머니가 채워지기보다 모두들 마음의 부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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