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수 공주대 교수

최근 공직자로서 직격(職格)을 상실한 국가보훈처 관료가 6.25 전쟁영웅인 백선엽 장군에게 모욕을 준 사건을 접하면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말이 떠올랐다. 일제 치하의 수재급 청소년에게 주어진 선택의 폭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독립투사가 되거나 미래 역량을 키우기 위해 일본육사, 동경제국대, 경성제국대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개인의 선택사항이기에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또 독립투사라 해도 조선 사회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나선 자, 공산주의 세상을 추구한 자, 민주공화국을 위해 매진한 자에 따라 평가는 달라져야 한다. 일본육사를 나왔다고 무조건 친일 매국노로 비난해선 곤란하다. 단지 일본육사졸업은 과정일 뿐이다. 거기서 배운 것을 훗날 국가를 위해 어떻게 사용했는지 따져봐야 한다. 그것이 역사적 정의다!

또 좌익들이 나부대는 ‘친일 매국노’라는 용어가 국민적 합의를 거친 것인지부터 묻고 싶다. 나는 ‘친일인명사전’을 제작한 좌익들의 추악한 의도와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자들에게 되묻는다. “너희들의 아비 어미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느냐?”라고. 만약 개명했다면 그것도 친일임을 분명히 일러둔다. 왜냐하면 일본군으로 복무하면서도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했던 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공군의 제5대 참모총장을 역임한 김창규 장군(일본육사 55기)과 제11대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김두만 장군이 그 주인공이다. 현재 두 분 모두 건강하게 생존해 계신다.

비(非)조종사 출신인 김창규 장군은 8.15해방 후, 정비장교로 근무하며 육군병기창에서 15㎏짜리 폭탄 274발을 제작해서 연락기 수준인 L-4, L-5, T-6 항공기의 조종사들에게 제공했다. 그 덕분에 우리 공군은 전쟁개시 3일(1950.6.25.~6.27)동안 북괴군을 상대로 초기 항공작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

또 일본육군소년비행병학교 15기을(乙) 출신인 김두만 장군은 말레이반도의 일본군기지에서 가미카제(神風) 특공훈련을 받다가 일제가 항복하는 바람에 목숨을 건졌다. 그는 6.25남침전쟁 때, 우리 공군 최초로 100회 출격기록을 세운 전설적인 빨간마후라로서 후배 전투조종사들의 롤-모델이다.

나는 2012년부터 2013년까지 김두만 장군의 회고록인 ‘항공징비록’을 집필하기 위해 그와 총 25회에 걸친 대면(對面) 인터뷰를 한 바 있다. 또 그와 100시간이 넘는 오랜 대화를 통해 A4용지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소중한 전쟁 사료를 발굴해냈다. 그것은 지금 내가 ‘6.25전쟁사’를 집필하는데 귀중한 참고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인터뷰 말미에 그에게 친일문제와 관련해서 몇 가지 질문을 드린 적이 있다. “친일문제는 내게도 무겁고 심란한 주제다. 16세 때, 일제가 비행기 조종기술을 공짜로 가르쳐준다는 광고를 보고 선택했을 뿐이다. 그것의 친일 여부를 그 어린 나이에 어찌 알았겠는가!” 김두만 장군은 백선엽 장군에 대해서도 한 말씀을 남겼다. “백 장군의 일본육사 선택도 내 처지와 비슷했을 것이다. 더구나 백 장군의 다부동 전투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자유월남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 점을 꼭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좌익들이 백선엽 장군에게 모욕을 주는 것은 그가 김일성의 불법 기습남침을 용감하게 격퇴시켜 대한민국의 적화통일을 막은 것에 대한 분풀이에 불과하다. 그러고도 천벌이 두렵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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