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개척자들이 금광을 찾아 몰려 들 듯이 충남 청양군은 한 때 금을 캐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곳이 바로 구봉광산이다.

최고 절정기였던 1949년부터 1970년까지 구봉광산에서만 캐낸 금이 1113만 6100g이었고 은(銀) 33만g이 생산됐으니 우리나라 최고의 '노다지'라고 부를 만 했다. 광산 근처에는 술집이 즐비했고 전국에서 모여든 한량들로 항상 북적였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않던 폭풍이 구봉광산을 강타했다. 1967년 8월 22일 낮 12시40분, 지하 125m에서 막장의 물을 퍼내던 김창선(당시 35세․처음에 양창선으로 알려짐) 씨가 갱목이 무너지면서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

물론 처음부터 태풍이 분 것은 아니다. 그 무렵 광산 매몰사고는 흔한 것이었고 수없이 죽거나 다치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에 언론에서도 보통 사고기사로 취급됐다.

광산 측에서도 구조작업을 서둘렀지만 파이프 설치가 실패로 끝나는 등 장애물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진리가 지하 125m 막장에서 일어났다.

김창선 씨는 이곳에 오기 전 해병대에서 근무했고 특히 통신병이었다. 그래서 막장에 설치된 갱도 연락용 전화기를 무너진 흙더미 속에서 찾아냈고 이것을 이리저리 조립해 사무실과 통화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것은 기적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살아 있다!" 생사를 모를 뿐 아니라 죽었을 가능성이 높은 때에 지하에서 전달된 산자의 음성은 국면을 바꾸어 놓았다.

또한 이 때 ‘행운의 조연자’가 나타났다. KBS 대전방송 오철환 기자가 아이스박스만큼 큰 구닥다리 녹음기를 메고 현장에 나타났는데 때마침 구조팀과 김창선 씨가 전화 통화하는 현장을 함께 한 것이다.

오 기자는 흥분해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녹음을 시작했다. “꼭 하고 싶은 말씀은?”, "우리 정애(딸)야, 경복이(아들)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

지하에 갇힌 한 아버지의 이 순박한 목소리는 그날 밤 전국 뉴스로 생생하게 전달됐고 전 국민이 감동에 휩싸였다.

여기저기 교회와 사찰에서 김창선 씨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법회가 열렸고 신문 방송은 연일 이 뉴스가 톱을 차지했다. 그리고 마침내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비서관을 급파하면서 빠른 구조를 지시했다.

이런 국민적 성원 속에 그는 그 해 9월 6일 오후 6시 마침내 구조돼 갱 밖으로 나왔고 그 순간 '인간 승리'의 만세 소리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전국에서 취재진이 이 광경을 지켜봤고 그 가운데는 NHK 등 외신들도 눈에 띄었다.

한 때 너무 춥고 배가 고파 절망한 나머지 빨리 죽을 수 있게 해달라며 구조진에 호소하기도 했던 김창선 씨는 그러나 끝내 그 절망을 딛고 368시간 35분, 날수록 16일의 사투를 승리로 장식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충남 땅 청양 산속에서 한 생명의 존귀함을 온세상에 감동적으로 펼친 휴먼스토리이기도 했다.

김창선 씨는 어느덧 반세기가 흘러 90의 노인이 됐지만 부여에서 '해병전우회' 회원으로 백제문화제 같은 큰 행사가 있을 땐 빠짐없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구봉광산은 과거의 영화를 땅에 묻은 채 휴광 상태인데 일부에서는 아직도 땅속에 17t 상당의 금이 있다고 보며 개발의 꿈을 그리기도 한다.

세계금융 시장에서 금의 가치가 자꾸만 커지는 상황이라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황금보다 더 귀한 것이 인간임을 이 사건은 일깨워 주고 있다.

[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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