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희 ㈜대원 전무이사(수필가)

분주한 한가위가 지나갔다. 매번 명절을 맞고 보내는 일은 어수선하고 허우룩하다. 친정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 빈자리가 커선가. 허전한 마음마저 보태어 마음을 가누기가 어렵다. 이런 내 마음도 모르고 동생들은 맏이가 부모 역할 하기를 원하는 것 같다. 명절에 친정집을 찾아갈 곳이 없다고 하소연하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 가족이 모여 한겻이라도 보내길 원한다. 나도 가끔 명절의 숨은 얼굴이 불뚝 일어난다. 동생들처럼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은 것이다.

명절 밑이면 누군가를 찾아가야 할 것만 같다. 부모님과 친척 그리고 지인, 평소에 은혜를 입은 분을 찾아뵙는 것도 좋으리라. 그래선지 명절엔 괜스레 마음이 들뜬다. 아무튼 어디든 나서려면 빈손으로 갈 순 없잖은가. 상대에게 건넬 선물을 고민하게 된다. 선물은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서로 기쁨이자 마음의 선물이라면 좋겠다. 서로에게 부담스럽지 않은 선물, 상대의 마음을 읽어 실속 있는 선물이면 훔훔하리라.

명절을 대하는 얼굴은 다양하다. 개성이 다르니 사람마다 다르리라. 평소에 편안하게 지내는 사이라면, 만남 그 자체가 설렘이자 즐거움이다. 반면에 한동안 연락 없이 데면데면하던 가족이나 지인을 만나려면 고역일 수도 있다. 사람의 마음은 옛 말씀과 고사를 들추더라도 간사하기가 이를 데가 없지 않은가. 명절에 그동안 잘 지냈느냐고 진솔한 말 한마디에 불편한 마음도 풀리리라 본다.

어디에도 만날 수 없는 화기애애한 광경이 우리 집에서 벌어진다. 요즘 세상에 스물두 명의 대가족이 시끌벅적하게 집안을 가득 메우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현관에 벗어놓은 신발을 오열 종대로 정리하며 다시금 가족의 숫자에 놀란다. 예전에는 부모의 역할을 알게 모르게 강요하는 동생들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었다. 이제는 아니다. 나이가 든 증거인가. 명절에는 역시 가족들이 모여 왁자그르르해야 제맛이 난다.

돌아보니 부모님이 우리에게 남겨주신 큰 유산은 바로 가족이다. 집안의 큰일도 가족들이 한마음으로 나서 줘 수월하게 치른다. 어린 조카들도 어느새 성장하여 부모의 키를 훌쩍 넘는 장정들이 되어 있다. 지난해는 딸이 결혼하여 사위와 손녀를 데리고 와 식구 수를 늘린 것이다. 삼대가 함께한 자리에 두 살 손녀의 재롱으로 신기하고 즐겁다. 동안에 못다 한 이야기를 편안히 나눌 수 있는 공간과 기름진 음식과 술이 있고, 무엇보다 가족과 살뜰한 정을 나누니 무엇이 부러우랴.

가족들이 머물다 간 거실과 방안 그리고 테라스가 휑하다. 한바탕 소소한 정담을 나누고 모두 각자 위치로 돌아간 것이다. 텅 빈 곳에 혼자 남은 듯 허전한 마음을 동생들은 짐작하랴. 아마도 부모님 생전의 마음도 이러했으리라.

가을밤은 깊어가고 방안에 만삭의 보름달이 들어와 있다. 푸른 달빛은 가라앉은 나의 마음을 위무하는 듯하다. 달님을 바라보며 가족들의 얼굴을 한 명 한 명 떠올린다. 언제 어디서나 건강히 지내길 달님께 비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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