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선생이 북관대첩비 세워줬다" 정문부장군 후손 묘소찾아 제올려

지난해 10월 20일. 100년 만에 국내로 반환된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에 세인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을 때, 정작 이 비(碑)의 주인공인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1565~1624) 장군의 후손들은 곤륜(昆侖) 최창대(崔昌大·1669~1720)선생의 은혜에 감사했다.

경남 진주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농포 선생 후손들은 "곤륜 선생이 아니었으면 북관대첩비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3일 오전 11시30분. 농포 선생 후손 40여 명이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모셔진 곤륜 선생의 묘소를 찾아 제(祭)를 올렸다.

▲ 100년만에 북한으로 인도된 북관대첩비 주인공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장군 후손들이 13일 전승비를 세운 곤륜(昆侖) 최창대(崔昌大) 선생의 충북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 묘소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한상현 기자
농포 선생의 14대 종손인 정기민(54·경남 진주 신안동)씨는 "북관대첩비는 지난 1709년 함경도 북평사(北評事·조선시대 정육품 무관 벼슬)였던 최창대 선생에 의해 세워졌다"면서 "비문 (碑文) 역시, 곤륜 선생이 직접 지으셨다"고 설명했다.

'북관'이란 명칭은 경상도를 영남, 전라도를 호남으로 지칭하는 것처럼 함경남북도를 두루 일컫는 말이다.

1592년 함경도 북평사로 부임한 농포 선생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킨 최배천(崔配天) 공(公)에 의해 의병장으로 추대된 이후 임명전투·백탑교전투 등 왜군과의 8차례 전투에서 잇단 승전보를 울렸다. 하지만 전쟁 이후 모함에 의해 오랫동안 그의 업적이 가려졌다.

100년의 유구한 세월이 흐른 1700년. 함경도 북평사로 부임한 곤륜 선생은 관북지방을 둘러보던 중 정문부 장군을 기리는 비석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709년 손수 비문을 쓰고 북관대첩비를 세우기에 이른다.

하지만, 함경북도 김책시 림명리에 세워진 북관대첩비는 일본의 패전내용이 담겼다는 이유로 1905년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면서 100년 동안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돼 왔다. 이후 1978년 재일 사학자 최서면 박사에 의해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반환운동이 줄기차게 이뤄져, 결국 남한의 품으로 돌아온 뒤 지난 3·1절을 기념해 북측으로 인도됐다.

곤륜 선생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이날 청원을 찾은 정문부 장군의 후손들은 이날 최창대 선생의 후손들인 전주 최씨 문중에 곤륜집에 있는 시(詩) 한 수를 액자로 만들어 선물했다.

곤륜 선생의 10대 후손인 최종형(68·청원 북이면 대율리)씨는 "너무나 감개무량해 뭐라 말씀드릴 게 없다"면서 "우리 자손들이 두고두고 보면서 정문부 장군의 업적을 기리도록 하겠다"고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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