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기 대전대 행정학부 교수

 요즘 우리사회의 화두는 양극화 해소다. 그것도 경제적 양극화의 해법을 놓고 대립하고 있다. 증세와 감세, 성장과 분배를 놓고 다툰다. 그렇다고 분배론자들이 성장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다만 이기적 사회구조 속에서의 성장은 빈부격차를 심화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특히 '좋다'라는 것이 자칫 자신에게 좋은 게 옳다는 의미로 받아 들일 때 이기적인 사회가 되고 만다. 이기적인 사회에서는 오로지 나의 이익만 존재한다. 다른 사람이야 굶어 죽든 말든 나와 나의 가족만 안전하면 그만이다.

나의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과 돈을 독차지하고자 한다. 필요에 따라서는 거짓과 조작을 통해서라도 나의 성과를 높이고, 남에 대한 피해는 불가피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이기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경제성장은 나의 소득과 재산이 늘어나는 것만을 의미한다. 심지어 빈곤은 당사자의 책임이요 그들의 몫이라고 치부하는 현상도 나타난다. 그러다보니 이기적인 사회에서 빈부의 격차는 날로 커질 수밖에 없다. 지금 지구상에는 20%에 해당하는 인구가 기아에 허덕이고, 6%의 인구가 부의 약 60%를 점유하는 불공평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인도의 성자 간디는 '진정한 경제성장이란 가난한 사람들의 형편이 나아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파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다. 정의로운 사회는 부의 분배가 도덕적이다. 능력보다 필요에 따라 분배가 이루어진다. 때문에 범죄도 없고, 남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간은 이상 보다는 현실에, 먼 장래 보다는 당장을 선호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사회'라는 가치를 실현가능한 대안으로 여긴다. 그런데 '좋다'라는 가치수준은 가장 낮은 단계이다. 가장 높은 가치수준을 '옳다'라고 한다면 중간단계는 '합의', 그리고 가장 낮은 가치수준이 '좋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는 아닐지라도 부자와 빈자가 모두 만족할만한 중간단계의 '합의된 사회'라도 이루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만족할만한 사회라는 합의를 이끌어내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래서 서로에게 거부감이 없는 '좋은 사회'를 떠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좋은 사회'란 모두에게 이익이 되고 합의를 지향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일찍이 경제학자 갤브레이스는 인간중심의 좋은 사회를 주창하면서 '좋은 사회란 모든 구성원에게 기본적인 삶의 조건을 보장하고 나아가 최저 소득계층의 권익을 제도적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좋은 사회를 이룩하는 데는 진정한 민주주의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는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체제를 통해서만이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과 그들을 대변하려는 양심적인 사람들의 의지와 영향력이 발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소외된 사람들을 대변하겠다고 공약하지만 이를 검증할 능력이 없는 소외계층들은 매번 이용만 당하고 만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소외계층들과 그들을 대변하려는 사람들에게 '좋은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후보자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는 것이 과제인 것 같다. 성장이냐 분배냐가 아니라 진정한 성장은 어려운 이들의 생활이 나아지는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정치인이라면 '좋은 사회'를 구축할 능력이 있다고 믿어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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