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진 청주대 연극과 교수

 근래 우리 문화 예술계에서 소위 '대박' 바람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수십 수백억 흥행 수입을 올렸다는 뮤지컬들이 줄을 잇는가 하면, 백만원대의 입장료에도 표 구하기가 힘들었다는 오페라 공연 소식이 귀를 의심케 한다. 어떤 유명 발레 공연은 인기가 높아 동일 작품을 여러 단체에서 동시에 공연했음에도 관중의 열기가 여전했다는? 전설 같은 얘기도 있다.

불과 십년전만해도 상상도 못하던 얘기들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기업 목적의 전문 제작 업체가 늘어나고 있다. 공연예술을 전공하는 한사람으로서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우리 예술이 자칫 본질을 벗어나서 흥미위주의 선정적 인기지상주의 풍토에 빠지게 되지는 않을가 하는 우려가 앞선다.

흥행에 성공한 예들이 대개 순수 우리 작품보다는 외국에서 이미 흥행에 성공한 유명작품을 소개하는 문화 교류 과정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이 대세다. '88서울올림픽'이후 우리 문화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현상중 하나는 문화상호주의(interculturalism)에 대한 관심이다. 특히 공연예술 분야에서의 이에 대한 관심은 괄목할만하다. 이는 또한 우리 사회가 추진하고 있는 국제화, 세계화 추세에 편승하여 가일층 확산되고 있다.?

문화(culture)의 특성중 하나는 복합적이라는 점이다. 모든 문화는 항시 다른 문화와 만나고, 서로 영향을 주면서 발전한다. 둘 이상의 문화가 섞이고, 상호 자극하고 충돌하는 상호보완적 과정을 통해서 발전하게 된다. 외래문화의 영향을 거부하고 독자성만을 고집하다보면 자칫 고립되어 결국은 고사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남미 정글속 원주민들의 경우가 그? 예를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문화 발전이란 둘 이상의 문화 사이에서의 상호작용을 통한 문화 변화 현상을 의미한다. 그런데 문화는 자연발생적이거나 우연한 것이 아니며 필연적이고 의도적인 것이다. 문화는 역사성을 바탕으로 하는 과거로부터 현재로 상속된 개념체계이며, 의식적이고 정책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문화 변화 또한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현상이며 사회 자신의 독창성의 표현이고 문화적 선언이어야 한다. 문화상호적 활동은 문화 변화의 과정이며 결국 문화 발전의 기회가 된다. 때문에 역사적, 사회적 안목과 의식을 바탕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근래 일고 있는 여러 형태의 국제화, 세계화 물결이 일면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이유는 그의 전반적 분위기가 대중의 인기에 관심을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라도 본질을 망각한채, 역사적 사회적 독창성과 필연성을 등한시하는 처사는 없는지, 감각적인 인기위주나 호기심 유발을 주제로 하는 경우는 없는지, 사적인 욕심이나 공명심리가 작용하지는 않는지?

이러한 충고적 비평은 자칫 민족주의적 편협한 생각이라는 반론의 대상이 될 여지도 있음을 안다. 사실 20세기 후반 들어 자기 토착문화의 보호 및 방어적 차원으로 문화 변화를 유도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특히 문화 침공의 역사를 경험한 라틴아메리카 등 여러 곳에서 그러한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리챠드 셰크너(Richard Schechner) 같은 사람은 문화 보호나 방어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자적 충고요, 제국주의자적 공명심의 발로라고 비난한다. 여기서 이 논쟁에 뛰어들 생각은 없다. 다만 문화적 행사를 계획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역사 앞에서 겸허하고 최상의 노력을 다하는 자세를 권하려는 것이다.

예술의 본래의 목표는 '그 시대의 아픔을 구원하는 자의 모습'이어야 한다. 기계문명을 성공시키면서 인류는 물질적 풍요와 편리를 획득했다. 반면에 놓친 부분도 적지 않으니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서로를 경쟁상대로 인식하게 되고, 그리고 결국은 상호 불신, 고립과 소외 등으로 이어지는 인간성 상실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아픔을 씻을 수 있게 사회를 통합하고, 재충전하여, 싱싱한 사회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 예술 본래의 역할이다. 이를 위해 예술작업은 미적 감동과 즐거움을 수단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결코 흥미 본위의? 즐거움이 목표로 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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