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영 중부대 총장

보궐선거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내년의 지방선거 바람이 분다. 중부권 신당의 나팔소리가 요란하다. 그리고 정치인들의 발길이 닫는 곳마다 지역사업과 정치성 공약이 거론되고 있다. 어느덧 지방도 정치에 오염이 되어서, 과거 중앙정치의 하부조직 노릇이나 하며 시혜나 바라던 때와 달라, 요즘은 '보따리'의 부피에 따라 '표'의 행방이 달라지는 모양이다.

전남도청의 무안시대 개막과 함께 호남고속철도 추진에 대한 대통령의 언급이 있고, 총리가 화답을 한다. 언젠가 하기는 해야할 사업이라지만 호남표 때문에 서두르는 것이다. 경부고속철도도 대구-부산 구간은 언제 완공될런지 막막하고, 대전과 대구의 역사는 착공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미 완공되어 운행하고 있는 경부선에 오송역이 추가되고, 호남선의 분기점이 오송으로 결정된 것도 치밀한 타당성에 근거한 결정이라기 보다 정치적 흥정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전역과 대구역의 위치(지상이냐 지하냐)도 그렇고, 김천역, 울산역이 추가된 것도 당초 계획안 관점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니 국책사업의 진행이 제대로 되겠는가? 벌써부터 호남고속철의 계룡산 통과문제로 갈등이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광역자치단체들은 기업도시, 혁신도시라는 실현 가능성도 없는 사업으로 갈등을 빚고 있다. 그래서 한 곳에 모아 시너지효과를 기대해야 할 정부기관들이 갈갈이 쪼개질 판이다. 정치바람 탓이다.

굵직한 지역개발사업의 득표력은 크다. 주민들에게 직접 피부에 와 닿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린벨트를 풀겠다거나 비행장 또는 산업단지와 같은 대형사업을 유치하겠다는 화끈한 공약들은 대개는 전시효과적이고 현시적인 사업이다. 과거에도 선거철이 되면 이런 사업의 삽질부터 하였다. 그러나 이러다가 멍든 사업도 많다.

지방자치의 발전논리는 주민참여에 의한 상호경쟁이다. 지방간에 공업단지 유치를 위한 경쟁을 벌리고, 관광지 개발을 위한 경쟁을 벌리게 된다. 필요하면 세일즈도 해야하고 경쟁도 해야 한다. 그러나 지방자치단체들은 경쟁보다 '정치'에 의존하고, 내실을 기하기 보다 화려한 그림을 선호해 왔다. 중앙정치가 그렇게 길들였던 것이다.

미국의 사학자 제임스 로빈슨은 '인간의 희극'이란 저서에서 '선거전은 고의적으로 사람을 감정의 수라장으로 이끌어 가며 냉정한 쟁점으로부터 관심을 흐리게 한다. 그래서 보통 때 같으면 능히 발휘할 수 있는 사고능력을 마비시킨다'고 경고한 바 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축제다. 그러나 선거를 의식해서 남발되는 지역사업을 보면 낭비적인 축제이다.

지금 우리는 지역갈등시대에 살고 있다. 제마다 자기고장에 대한 자존심에 예민하다. 좋은 사업을 끌어와야 하고 혐오성 사업은 다른 지역으로 밀어내야 한다. 제마다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박대를 받고 있다는 피해의식에 젖어 있다. 낙후된 지역에서는 낙후된 서러움을 달래거나 때로는 자극하는 것이 선거전략이 되기도 한다. 이로 인한 폐단이나 부작용은 클 수 밖에 없다.

그동안 내 고장에는 싫고 그렇다고 남주기도 싫다고 10여년이나 미뤄왔던 방폐장 위치를 경주로 선정한 것은 그 민주적 절차에 있어 아주 잘한 일이다. 여기서 '정치'는 배제되었다.

무책임한 공약의 남발이 오히려 지역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이쪽 주민의 혜택은 저쪽 주민의 상대적 소외감을 주기 마련이다. 쟁점이 되어 있는 사안을 조정하고 양보하도록 해야 할 정치인들이 오히려 갈등을 더욱 심화시킨다면 큰 일이다.

원래 개발사업이란 전문가들에 의한 냉철한 타당성분석과 예산조정 과정 그리고 주민여론의 여과를 거쳐 확정되게 마련이다. 정부로서 또는 정당으로서 미래의 비전이나 지역의 개발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책임하고 즉흥적이 되면, 정치의 탁류가 지방을 오염시키는 결과가 된다. 지역개발사업이 표의 볼모일 수 없다. 선거철에 잘못 뿌린 씨는 후에 독이 될 수도 있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