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 논설위원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 주빈국으로 선정된 한국이 얻은 성과는 나름대로 컸다. 자동차, 휴대전화, 반도체를 잘 만들어 파는 신흥공업국 이미지에서 문화의 역사와 향기가 만만치 않은 호기심가는 나라로 바뀐 것만해도 큰 성과이다. 아울러 지금껏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던 우리 문학, 출판물의 해외진출 노력이 이번 행사를 계기로 시너지 효과를 얻게된 것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빈익빈 부익부는 어김없어 이른바 잘나가는 출판사를 중심으로 문화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출판-문학계 인사들로 구성된 파견단의 활동은 아쉽게도 우리나라 출판문화계 전체의 역량과 지평을 보여주기에는 미흡하였다. 상징적으로라도 지방에서 활동하는 문인과 지명도는 그리 높지 않지만 성실하게 책을 만들어 내는 지역 출판계 인사가 대표단에 포함되었더라면 우리나라 문화수준의 저변확대가 돋보였을텐데 여기까지는 머리가 미치지 않았던 모양이다. 너나없이 문화의 시대, 문화향유, 문화복지를 외치면서도 나날이 편중되는 중앙집중 현상은 문학, 출판계의 경우 더욱 불거지지 않는가.

메이저급 출판사의 위세와 이곳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일부 인사들의 이른바 문화권력화는 자못 심각하다. 더구나 매스컴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들의 움직임은 별다른 여과없이 곧 이즈음 문화 트랜드로 자리잡는 실정이어서 문화의 벽과 이질감은 상대적으로 높아만간다.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을 계기로 가시화될듯하던 우리나라 문인의 노벨문학상 수상도 또다시 물건너 갔다. 88올림픽 당시 손에 잡힐듯했던 노벨문학상 수상이 결국 문단과 문화계의 불협화음과 알력, 이러저러한 사유로 실패로 끝났던 전례에 비추어 볼 때 조속한 시일안에 다시 우리문학, 우리 문인이 국제무대의 관심을 끌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많은 문인들이 문화예술 정책입안, 행정, 자문에 참여하고 있지만 다른 분야의 발전에 비하여 문학의 영세성이 개선되지 않는 이유는 문인들의 양반스러움과 탈세속성향 때문만일까.

행정중심도시가 진척되고 공공기관의 지방이전이 구체화 되지만 문학, 출판의 진정한 지방분권화의 단초는 아직 요원해 보인다. 문인들이 국회나 행정부에 다수 진출하여 실물감있는 문학진흥정책을 펼치면 어떨까. 과거 극소수 문인이 장관이나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지만 국회의 경우 군사정권의 취약성을 호도하려는 구색맞추기 성격이었고, 장관은 소신있는 정책을 펼치기에 재임기간이 너무 짧았다.

정권이 바뀌어도 문화부 장관만큼은 최소 5∼6년 길게는 10여년을 일하게 하는 문화강국 프랑스 정부의 안목이 새삼스럽다. 문화가 삶을 풍요롭게하고 황금알을 낳는 미래지향적 산업의 토대가 된다고 들떠있지만 아직도 문화는 '잔치를 앞두고 부를까 말까 고심하다가 잔칫날 아침에 마지 못해 부르는 가난한 먼 친척' 처지를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문예진흥원이 문예진흥위원회로 바뀌고 달라질 혜택이 무엇인지 궁금하고 조만간 또다시 변경될 문화관광부 명칭 역시 아직은 튼실하지 못한 위상을 보여준다. 아예 '문화부' 또는 '문화예술부'로 굳혀 놓으면 좋으련만 1982년 신설된 체육부가 90년 체육청소년부로, 93년에는 문화와 결합하여 문화체육부, 98년 문화관광부로 바뀌더니 이제 다시 문화체육관광부로 개칭된다는 장관의 설명이다.

예전에 공보부와 문교부 관할이던 문화업무를 '문화'자를 붙인 단독 부서에서 취급한지 꽤 시간이 지났건만 상황은 더 어려워지고 있다. 각고의 노력으로 작품을 발표해도 자존심을 지켜줄 최소한의 원고료조차 받기 어렵고 좋은 책을 펴내도 대형사들의 광고, 물량 공세와 서울편중의 독자의식에 치어 대체로 묻혀버리는 현실에서 '문화의 달' 10월 내내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 한국관의 화려한 치장과 이벤트를 바라보는 마음은 착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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