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60년 특별기획]⑤ 강점기시대의 광복

▲ 1941년 3월 '항일독립운동 투쟁 동지회'의 일원으로 찍은 사진. 맨 뒷줄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김택점 옹.
"치욕의 시대때 우리의 소망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독립'이었다면, 이젠 '통일' 아니겠습니까?"

항일독립투사 김택점(88·대전시 중구 문화동) 할아버지는 생애 마지막 소원은 우리 민족의 '통일'이라고 강변한다.

김 옹은 일제때 중국 절강성 일원에서 '김광석'이라는 가명으로 '무림 공작대'의 일원이 돼 독립운동을 펼치다 광복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2월에는 가족과 조카 등 18명의 가족 전체를 이끌고 남하, 인천에서 부두 막일로 가족을 부양했다고 한다.

홀어머니와 부인 등 부양 가족을 고향(평남 강서)에 두고 20대 초반의 나이에 이국 타향으로 건너가 항일전선에 뛰어든 그였지만, 국가로 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 받은 것은 10년도 채 안됐다.

진작 공로를 인정받았으면 조금이나마 삶이 편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부인과 사별한 지난 95년에서야 권리 찾기에 나섰다.

부인은 죽기전 "살아와서 다행이지만 무엇때문에 이국땅에서 그 고생을 했느냐? 이제 (공을) 말할때도 되지 않았는냐?"라며 독립투사의 아내로서 살아온 모진 인생에 대한 한을 풀어놨다고 김옹은 안타까움을 전했다.

김 옹은 "그런 제도가 있는지도 솔직히 잘 몰랐지만, 나의 공은 다른 독립투사들에 비해 내세울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며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늦게 나마 정부로 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은 김 옹은 장남이 있는 대전으로 내려와 살고 있다.

김 옹은 이번 광복 60주년 기념행사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런 김 옹의 눈에 비친 요즘 세대들은 또다른 안타까움이다.

김 옹은 "해를 거듭할수록 광복에 대한 의미를 되돌아보려는 의지가 약해지는 것을 보면 못내 씁쓸한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60년 전과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고, 국적 포기자나 '전쟁나면 도망가겠다'라는 등의 얘기가 나오는 것은 나를 포함 기성세대의 잘못이다"라고 현 사회의 모순에 일침을 가했다.

"광복의 의미는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치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말자는 현 세대의 다짐과 약속에 있다고 본다"고 김 옹은 강조했다.

그는 또 "한 민족은 서로 반성하고 대동단결해야 한다"며 "그것이 곧 강대국으로 가는 지름길이자 '통일'로 가는 초석"이라고 결어를 맺었다.

나라 잃은 설움에 젊음을 이역만리 중국에서, 나머지 생은 분단의 아픔을 부여안고 타향천리에서 보낸 김 옹.

역사의 회오리를 뜨거운 가슴으로 이겨낸 그의 마지막 소원이 살아생전 이뤄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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