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의 정치소설 '1984'에는 막강한 권능을 지닌 독재자가 등장한다. '빅 브러더'는 텔레스크린을 통해 모든 국민의 사생활을 끊임없이 감시한다. 국가권력이 시민의 감정, 표정 등 일거수일투족까지 완전 통제하기란 식은 죽 먹기다. 전국 각 가정, 사무실마다 설치된 감시 카메라 및 첨단 통신기술만 잘 활용하면 그만이다. 음울하고 억압된 전체주의에서 망가지는 건 바로 인간이다. 가공할 만한 위력이란 바로 정보에서 나온다. 정보의 독점으로 사회를 옭아매는 권력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우리 국민도 그런 섬뜩한 장면을 떠올리며 마음이 썩 편치 못하다. 문민정부에 이어 국민의 정부에서도 불법 도청(盜聽)을 했다는 것은 한마디로 충격이다. 도청의 최대 피해자로 자처해온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구태를 탓하면서도 결국은 그걸 닮는다고 했던가. 군사독재정권 시절이야 말로 아예 인권 자체를 무시한 통치체제이었으니 더 이상 말하면 무엇하랴. 그토록 숱하게 치른 희생의 대가가 그 뿐이라니.

때마침 어제(8일)는 1973년 바로 그날 닉슨 미국 전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감추려다 들통나 물러난 날이다. 이 사건은 닉슨이 재선을 노렸다는 점, 그리고 민주당 당사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됐다는 사실로 인과관계를 요약할 수 있다. 닉슨이 이를 조작하기 위해 자꾸 거짓말을 하다보니 미국 시민의 공분(公憤)을 사게 된 것이다. 그러고도 닉슨이 세계 지도자로서 떳떳하게 행세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당시 닉슨은 민심에 굴복해서 하야(下野)했지만 우리의 경우 그간 폭넓게 이뤄진 불법도청 활동에 견주어 보면 하찮은 일과성 해프닝일 수도 있다.

과연 국가란 무엇인가. 그리고 국가는 국민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국가권력이 국민을 의식하지 않고 벌이는 행태는 결국 일탈하기 일쑤다. 그럴경우 특정인의 입맛에 맞는 정보를 생산·가공·조작하는 데 익숙해진다. 그게 관례처럼 하나의 통치 수단으로 악용됐던 사례는 지난 군사정권 시절 뼈저리게 목격한 바 있다. 불법도청팀이 자료를 빼돌린 후 개인의 신분보장용으로 활용하거나 약점을 지닌 당사자들과 거래를 시도했을 정도라면 그 실태를 알만 하다.

법이나 제도 보다는 이른바 '권력의 사용화(私用化)'를 선호하게 되면 결국 정보의 독점화를 가속화시킨다. 그건 끼리끼리 나눠먹으려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필요하다면 국민의 눈과 귀를 막는 범죄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조지 오웰은 하나의 적절한 용어를 제시해준다. 독재자는 뉴스피크(Newspeak. 신조어)를 사용하면서 인간의 본성조차 마비시키는 상징조작도 마다하지 않는다. '전쟁이 평화'이고, '자유가 속박'이라고 해도 국민은 믿을 수밖에 없다. 자유로운 인간의 속성을 감안한다면 굳이 국민의 신체를 수용하거나 이동 제한하지 않고도 지배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모름지기 인간다울 수 있는 여건을 갖출 수 있는 데 모아져야 한다. 향후 우리 인간사회가 과학발전과 더불어 삶의 질을 높여 줄 것이라는 장밋빛 환상에만 젖어 있을 수는 없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누군가에 의해 부당하게 감시를 받고 통제받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처해야 함은 물론이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이미 정보인권을 유린할 여지가 있는 정부의 컴퓨터 통신망과 데이터베이스를 판옵티콘(Panopticon)에 비유한 바 있다. 통치자가 감시 체제를 통해 대중을 통제하면서 전체주의적 권력의 도구로 삼을 가능성을 경계한 대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사태는 바로 그런 점에서 훗날의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국가기관에 의한 불법적인 도청은 싹을 잘라야 한다. 그러자면 먼저 진상규명과 처벌, 그리고 재발 방지를 위한 사회적인 합의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그간 그랬듯이 도청문제가 나올 때마다 "그렇지 않다"는 면피성 발언으로는 사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사실 그대로 솔직하게 털어놓은 후 국가 안위를 위한 국가정보기관의 기능 재정립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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