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이 얼마나 좋은지 아나… 부산·경남 사람들 (이번에 다른 사람이 대통령 되면)영도다리 빠져 죽자."

"부산·경남·경북까지만, 요렇게만 딱 단결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 …"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일으켜야 돼."

지난 92년 대통령선거를 사흘 앞둔 12월 11일 아침에 일어난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의 녹취록 중 일부다. 그 좋은 장관자리라도 하려면 지역 기관장들이 나서서 김영삼(YS)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논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남권을? 중심으로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 속에 결속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결국 부산·경남 출신 김영삼 후보는 대구·경북의 반감을 잠재우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비록 국민당에 의해 폭로된 사건이지만 그 가운데에는 도청(盜聽)이라는 음습한 정치공작이 숨어있다. YS는 처음엔 자신도 공작정치에 의한 피해자라며 진상 규명을 강조했지만, 도청이라는 비도덕성을 비난하기에 바빴다. 13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 따져 봐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우리는 요즘 당시 상황을 떠올리는 또 하나의 불법도청 사건 앞에서 비애를 느낀다. 안기부 X파일로 전국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정(政)·경(經)·언(言)의 추악한 연결고리가 엿보인다. 지난 97년 대선 과정에서 재벌 고위간부와 중앙언론사 사주간에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정치자금 등을 논의하는 내용이 폭로됐다. 국가정보기관에 의해 도청됐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한국의 이너서클에 깔려 있는 '끼리끼리 인맥 형성 후 권력 나눠 먹기식' 발상이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그렇지 않아도 삼복더위 속에 짜증만 불러 일으킨다.

더욱이 아이러니한 것은 도청 시점이 문민정부를 표방하던 YS정권 당시였다는 점이다. YS의 정치 역정을 볼 때 도청과 연금 등 공작정치에 신물이 났을 법도 한데 실제로는 그의 집권기간에도 권력기관에 의한 도청이 사라지지 않았다니 충격적이다. YS가 직접 도청내용을 보고 받았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장남 현철 씨에게 보고됐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권력이란 그렇게 장막 뒤에서 음습한 내음을 즐기는 속성을 뿌리치기가 어려운가 보다. 이런 류의 도청테이프가 8000여개에 달한다는 주장 자체가 놀랍다. 도청파문으로 얼마나 많은 날이 지샐지도 모른다. 국가권력에 의해 개인의 사생활이 마구 침해받는 현실은 더 이상 지속돼선 안된다. 테이프의 존재여부를 먼저 명백하게 밝혀야 한다.

그렇다고 사건의 핵심은 국가권력에 의한 불법 도청이 자행됐다는 사실에 머물지 않는다. 테이프에 담긴 내용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기필코 밝혀내야 한다는 점이다. 자칫 불법도청의 위법성만 따질 경우 권력을 둘러싼 비리를 간과하는 우(愚)를 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경계해야 한다. 벌써부터 일부 정치권이나 관련 당사자 주변에서 그런 조짐이 보인다. 음해성이라거나 표적 공작이라는 반응이 바로 그것이다. 과거 비리라는 이유를 들어 적당히 넘어가려는 저의가 없는 것인지 검증해볼 필요가 있다.

이번 기회에 확실한 처방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문민정부 출범 이래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적인 여망이 봇물을 이뤘지만 막상 정치권 주변의 생리는 여전히 구태를 벗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치열한 반성의 순간을 맞아야 한다. 아무리 민주적인 제도를 갖췄다 하더라도 이를 실현하려는 집권자나 지도층의 의지나 도덕성이 허술할 경우 어떤 결과가 올건지는 자명하다. 이미 각종 게이트나 도청 파문을 보더라도 그렇다. 어두운 과거를 통해 역사적인 교훈을 얻지 못하면 또 다시 그 길을 갈 수 밖에 없다. 이럴 때일수록? 주권자인 국민의 몫이 크다. 권력에 대한 감시체제를 강화해야 한다. 권력은 너무나 쉽게 썩기 마련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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