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괴산군 사리면 쌀전업농, 김용두·종화씨 父子

▲ 김용두씨/사진=박선표 기자
예년같으면 벌써 모내기가 끝나고도 남았을 요즘. 충북 괴산군 사리면 중흥리 마을 한가운데? 육묘 출하장으로 쓰고 있는 김용두(71)씨 집 앞마당에는 확성장치를 통해 흘러나오는 다급한 전화벨소리와 모판을 싣고 바삐 떠나려는 화물차의 엔진소리로 시끄럽기만 하다.

최근 20도가 넘는 일교차로 충북도내 농가들의 못자리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봄이 짧아진다는 기후예측발표로 일찍부터 모내기 준비를 서둘렀던 지역 농민들. 4월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모내기를 하면서 부지런을 피웠던 농민들은 냉탕과 열탕을 드나드는 변덕스러운 일교차에다 뒤늦게 내린 서리에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오랜 세월 쏟아지는 별똥별 하나, 두엄에 쓰이는 잡초 하나에도 의미를 구하고 농사일과의 연관성을 짚어 보아 왔던 습성 때문이었을까. 지역에 육묘은행을 서둘러 설치해야 할 것이라는 김씨의 주장은 그야말로 선견지명(先見之明)이었다.

김용두씨와 아들 종화(37)씨가 주도하고 있는 '푸른들작목반'이 운영하는 못자리 뱅크. 올해 처음 육묘를 내기 시작했지만 첨단시스템에다 건강한 모로 명성은 이미 호서지역에서 경기북부까지 자자하다.

이들이 가동하고 있는 육묘시스템은 볍씨 발아기를 거쳐 일단 일괄파종기로 들어간 뒤엔 10일 못되어 이앙하기에 충분한 모가 생산될 만큼 탁월하다. 시장수요에 맞춰 육묘판 10만 상자 이상도 생산할 수 있는 푸른들작목반의 육묘은행이 지역 들판에서 못자리의 자취를 감추게 만드는 등 새로운 농경풍속도를 탄생시킴과 동시에 뜻하지 않은 재해를 당한 농사형제들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는 것이다.

▲ 김종화씨 /사진=박선표 기자
충북 괴산군 사리면을 대표하는 농사꾼 김용두·종화씨 부자는 선진농법을 전수하고 전수받는 사제지간이면서도 20년지기 농사 동료다. 현재의 사리면 저수지 근처 소매리 응암마을에서 태어난 용두씨. 고조부와 증조부 그리고 증조모가 효자·열녀로 칭송을 받아 지금까지 효열각이 전해지고 있을 만큼 심성이 곧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탯줄과 함께 이어진 가난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8남매를 키우던 김씨가 농사를 붙일 수 있는 땅이라 봐야 대부분 남의 소유인 논밭 2000여평.

하지만 김씨가 농사짓는 방식은 달랐다. 비료가 귀했던 당시 김씨는 퇴비에 쓸 영양 많은 풀을 찾아 10리길이 더 되는 백마산과 보광산 일대를 누비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며칠이고 깎은 풀은 현지에서 말려 무게를 줄인 다음 마을로 들여왔다. 김씨는 영양만점의 말린 풀을 작두로 잘게 썰어 인분과 물, 그리고 제초제 성분이 포함된 약초액 등에 재워 발효시킨 다음 이를 자신의 경작지에 적용했다.

이같이 연구하는 영농의 결과는 1972년 충북도에서 밀농사 부문 최고의 다수확 농가로 뽑히게 됐다. 뒤이어 전국에서도 이 부문 2등을 차지하는 영예를 차지했다. 단보(300평)당 600㎏. 비료와 농약이 없다시피 했던 당시로서는 누구라도 함부로 기대할 수 조차 없던 수확량이다. 당시 농림부 심사위원들은 김씨의 밀밭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아무 질문도 없이 도착한 지 5분도 못되어 되돌아갔다고 한다. 뒤이어 군수 표창을 비롯한 각계인사들의 상장과 격려가 쏟아진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현재 전북 김제평야를 중심으로 국내 쌀농사를 지켜낼 보도(寶刀)인양 여겨, 적용을 확대해 가고 있는 '고시히카리' 품종의 도입도 혜안을 지녔던 김씨에게는 이미 20여 년 전의 일이다. 선진농업가로서 김씨의 이러한 정신은 아들 종화씨에게 고스란히 전수된다.

1980년대 초반 중학교를 마칠쯤, 종화씨는 부친을 따라 농사일로 집안과 지역을 살려 볼 것이라며 점차 인기를 잃어가던 농고 진학을 선택했다. 군을 제대하면서 종화씨의 성실성을 높이 산 굴지의 기업으로부터 높은 급여를 조건으로 입사 제의가 있었지만 아무런 미련없이 뿌리쳤다. 논 2000평과 밭 1000평으로 시작한 농사. 이제는 논농사만 무려 3만여평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 하우스 포도가 600평, 한우와 사슴도 꽤나 키우고 있다.

지난 2000년 괴산군 최초로 오리를 이용해 친환경 쌀을 생산하기도 했던 종화씨는 올해부터는 종이멀칭모내기를 도입, 제초제 사용을 배제하고 있다. 이 역시 괴산군 최초다.

농사꾼 종화씨의 경력은 화려하다. 1994년 괴산군 4H회장, 이어서 95년엔 충청북도 4H회장. 1996년에 전국 최연소 나이(당시 26세)로 이장 일을 보기 시작했던 종화씨는 10년째 이장이다. 지난 2003년에는 농림부가 뽑은 '우리 농업의 미래를 열어가는 10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2004년부터는 지역농협이 출범한 이래 최연소로 이사에 등재돼 회원농민들의 이익을 책임지는 위치에 서기도 했다.

"삽질과 호미질 외에는 아무것도 가르친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 김용두씨의 말이다. 용두씨, 종화씨 부자. 이들은 재산과 기술보다는 고된 삽질과 호미질로 상징되는 실천철학을 전승하고 있는 것이다. 허리가 끊어지는 노동의 고통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의 미래로 향하는 열쇄임을 깨닫고, 이를 감내할 줄 아는 지혜. 김씨 부자의 삶은 이 같은 지혜가 아직도 유효함을 우리에게 웅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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