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희 수필가

한(恨)이 서린 물상이다. 현세에서 내세를 부른 것인가. 여인의 손에 길든 항아리에서 애증의 삶이 엿보인다. 더불어 수면 위 윤슬처럼 반짝이는 항아리와 부엌의 구석에 자리 잡은 꿀단지가 떠오른다.

나는 지금 태초에 빛살의 발자국을 따라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적막한 공간에 빛마저 없다면, 칠흑 같은 어둠만이 존재하리라. 오래된 항아리의 빙렬도 흐릿한 '아리랑' 문자도 보이지 않으리라. 그는 붓글씨를 그리기도 어려운데 어찌하여 한이 서린 항아리의 부조에 마음을 두었던가. 그을음이 서린 먹빛의 역사로 거슬러 오른다.

어디에서 이런 낯선 작품을 볼 수 있겠는가. 정녕 남다른 서예가이다. 그도 처음에는 이름난 동서양 서예가의 붓글씨를 흉내 내는 일로 수백 수천 날 보냈으리라. 어느 날인가 그 놀이도 싫증이 난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생각지도 못한 낯선 새로운 세계를 열어놓을 수 있으랴. 범종과 빗살무늬토기, 항아리 등의 우리의 옛것을 소재로 자신만의 독특한 먹빛 문자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의 작품 ‘항아리’는 향수 어린 물상이다. 여느 작품보다 대작도 아니고 단순하며 고아하다.

하지만 유독 발길을 붙잡는 어떤 기운이 있다. 슬픔 내지는 서러움, 그리움의 여느 감정을 넘어 여인의 한이 느껴지는 듯 가슴이 아리다. 항아리에선 투명한 빛을 발견할 수가 없다. 어머니의 손길을 잃은 탓에 빛이 사라진 것일까. 빛깔 또한 먹빛을 잠재운 그을음의 색이다. 일생을 마음껏 불사르지도 못하고 타다 남은 잔해처럼, 당신의 생애 흔적의 무늬를 잿빛 토기로 표현한 것일까. 삶의 애증의 그림자를 그리라면, 바로 이런 빛바랜 그을음의 빛깔이리라. 아니 태초의 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른다.

빛살의 흔적이 어찌 강물에만 있으랴. 나의 유년시절 기억 속 윤슬은 장독대 항아리에 닿아 있다. 장독 옆 펌프가로 드나들 적마다 보았던 빛살이다. 뭇별이 내려온 듯 대낮에도 항아리의 뚜껑과 허리통이 반짝거렸다. 이 모두가 친정어머니의 손길이 빚은 빛살이다. 푸르스름한 경계에 선 새벽에 당신이 비손하던 곳도 항아리 앞이고, 맑고 투명한 날 항아리를 무시로 닦던 분도 어머니시다. 당신과 항아리는 불가분의 관계인 것처럼 손길이 닿아 있다. 항아리는 어떤 형언할 수 없는 애증의 대화를 아니 무수한 언어를 담고 있으리라.

신철우 서예가의 작품 ‘항아리’를 바라본다. 기원전 여자들이 밖으로 걸어 나오는 환각을 느낀다.

나도 이미 이곳을 떠나 대열 속에 서 있다. 고통스러운 내세의 삶이 현세로 부른 것일까. 삶의 원형이 작가의 마음을 뒤흔든 것이다. 어머니의 질곡 많은 생애를, 여성에 삶의 시원을 더듬는다. 작가는 어머니의 마음을 세심히 읽어 항아리에 비유한 것이다. 작가의 서체 또한 한이 서린 노래이다. 바람에 댓잎이 서걱거리는 것처럼 '아리랑' 가사가 엷어졌다 짙어졌다 아예 흐릿해진다. 당신이 스쳐간 빛살의 발자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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