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식 사회부장

동물의 본능 중 가장 지고지순한 게 자식사랑이다.

진화의 고·하등을 막론하고 새끼를 사랑하고 보듬는 그들의 모성애와 부성애는 지구상 어떤 생명 현상보다도 더 큰 지대함과 숭고함이 있다.

동물의 이러한 자식사랑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나나니벌을 보자. 겉으로 보기엔 자신의 집에 알 낳으면 두 번 다시 관심을 두지 않는 무정한 어미처럼 보이나 실은 그렇지 않다.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가 행여 불편할세라 산란 전에 온 힘을 들여 정성껏 집을 짓고 그 안에 새끼가 먹고 자랄 충분한 먹이를 물어다 넣고 알 낳은 후 입구를 감쪽같이 막아 천적이 범접 못하게 하는 남모르는 자식사랑을 한다.

나비의 자식사랑도 남다르다. 나비들은 대부분 알 낳을 때 아무 데나 낳지 않고 애벌레의 먹이가 될 '기주식물'에 낳음으로써 갓 태어난 애벌레가 금방 먹이를 먹을 수 있게 배려한다. 연약한 애벌레가 먹이 찾아 헤매다가 천적에게 당하지 않고 하루바삐 자라도록 하기 위한 진화의 산물이다. 곤충 가운데 에사키뿔노린재가 있는데 건들면 고약한 냄새를 풍기긴 하지만 새끼사랑엔 눈물겨움이 있다. 적당한 자리에 몸을 푼 어미벌레는 지친 몸을 돌보지 않고 알이 깨날 때까지 보호하기 위해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온몸으로 감싸 안은 채 서서히 죽어가는 숭고한 사랑을 보여준다.

예전엔 흔했으나 지금은 희귀종이 돼 버린 물자라란 수생곤충은 수컷이 암컷의 알을 받아 등에 지고 다니며 부화할 때까지, 햇빛이 필요하면 물밖에 나와 일광욕을 해주고 적이 나타나면 잽싸게 몸에 숨겨 보살펴주는 끔찍한 자식사랑을 한다.

남의 둥지에 몰래 알을 낳아 생면부지의 둥지 주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새끼를 기르도록 하는 뻐꾸기와 두견이는 또 어떤가. 무턱대고 남의 빈 둥지만 있으면 궁둥이 들이밀고 알 낳는 게 아니라 부화한 자신의 새끼가 둥지 주인에게 해코지 당하지 않고 잘 자랄 수 있도록 덩치 작은 새 둥지만 골라 알 낳는 지혜가 있다. 얼핏보면 둥지도 틀지 않고 알도 품지 않으며 먹이도 물어다 주지 않는 순전한 얌체족 같지만 실제론 '자식의 훗날'을 걱정해 미리 챙기는 모성애가 있다.

반마반어(半馬半魚)처럼 생겨 해마(海馬)라고 이름 붙은 실고기과의 물고기는 수컷 배에 육낭이 있어 이 주머니로 암컷의 알을 받아 '어화둥둥' 부화시켜 키우는 부성애를 발휘한다.

동물들의 사랑은 비단 내리사랑만 있는 게 아니다. 자식의 어미에 대한 치사랑도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게 까마귀의 반포지효(反哺之孝)다. 까마귀는 어릴 때 어미가 물어다 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자라지만 새끼가 자라고 어미가 늙게 되면 그때부턴 새끼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바치는, 은혜를 보답할 줄 안다.

열거하자면 끝이 없는 이 같은 동물들의 '핏줄사랑'은 그 내면을 알면 알수록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가슴 저릿함마저 느껴진다. 기막힌 자연섭리가 아닐 수 없다.

자연은 인간의 어머니라고 했다. 작은 미물들도 이같이 헌신적인 사랑으로 '대(代)내림의 의무'를 다하는데, 어째서 만물의 영장인 우리 인간들은 그들이 주는 교훈을 애써(?) 외면하는 것일까.

걸핏하면 부모란 사람들은 자녀들을 학대하며 내다버리고, 자식이란 사람들은 부모 대하길 '웬수'처럼 대하고 폭력까지 휘두르며 심지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만행까지 저지르니, 말세란 말이 괜한 말이 아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들리는 게 패륜이요, 눈에 띄는 게 몸서리쳐지는 사건이다. 뉴스 보기가 겁나고 신문 펴들기가 두렵다.

해마다 가정의 달은 돌아오건만, 진정한 어린이날은 실종된 지 오래고 어버이날의 참된 의미는 빛바랜 지 까마득하다.

부모님께 효도 한 번 못하고 자식에게 아비 노릇 못하는 주제임을 너무도 잘 알기에, 고개 들어 자연 보기가 더욱 민망한 입하의 5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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