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위권 성능 '수출효자'
의약품 개발·대용량 반도체 생산, 냉중성자 생산 韓 포함 세계 8개국, 네덜란드 수출로 유럽 판로 개척

▲ 한국원자력연구원이 운영 중인 연구용원자로 하나로. 원자력연 제공
일반적으로 원자로(原子爐)라고 하면 고리 1호기 등 원전을 연상하지만, 전기 생산은 하지 않고 연구 목적으로 가동되는 원자로가 있다. 바로 연구용 원자로(이하 연구로)다. 현재 전 세계에 250여기의 연구로가 운영 중이다.

한국은 대전 한국원자력연(이하 원자력연)의 연구로 ‘하나로(HANARO’가 유일하게 운영되고 있다. 연구로는 산업용 재료 개발이나 암 등의 질병 치료에 쓰이는 의약품 물질 개발에 활용된다. 가동 원리는 원전이나 연구로나 비슷하다.

우라늄으로 제작된 핵연료를 원자로에서 연소시키면 열과 중성자가 발생한다. 원전을 여기서 열을 활용해 물을 데우고 발생한 수증기로 터빈을 돌려 전기를 생산한다. 연구로의 경우 열은 그대로 버리고 중성자만 활용한다는 것이 차이가 있다.

◆의료부터 반도체까지

하나로 연구로가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의료 분야다. 요오드·몰리브덴 등 안정된 물질을 연구로에 넣으면 중성자와 충돌하며 방사성 동위원소로 변한다.

동위원소는 암 진단과 치료에 쓴다. 방사선 암 치료는 다양한 동위원소가 특정한 암세포에만 달라붙는 점을 이용한다. 몰리브덴 동위원소의 경우 몸에 들어가면 암세포에 달라붙는데, 이들이 내뿜는 방사능을 자기공명영상(MRI) 등으로 관찰해 암의 발생 여부와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로는 산업용 동위원소도 생산해 선박이나 항공기의 비파괴 검사에 활용된다. 이리듐 동위원소가 내뿜는 방사선을 이용하면 제품의 정확한 크기와 두께를 측정하는 것은 물론 내부의 미세한 균열까지 파악할 수 있다.

전기자동차나 고속철도 등에 사용되는 대용량 전력용 반도체도 하나로에서 만들어진다. 반도체 제작에 사용되는 실리콘은 전기가 통하지 않는다. 반도체 제조업체들은 화학물질에 실리콘을 담가 전기가 통하게 하는데 이를 ‘도핑’이라 한다. 화학적 도핑은 전력을 대량으로 소비하는 고성능 반도체를 만들기에는 불량률이 높다.

이를 보완한 것이 중성자 도핑이다. 하나로에 실리콘을 넣으면 중성자와 충돌하면서 전기가 통하게 변하는데, 품질 면에서 화학적 도핑보다 훨씬 뛰어나다. 원자력연은 하나로에 ‘냉중성자 연구 시설’을 구축했다. 원자로에서 나온 중성자는 높은 에너지를 갖고 있으므로 ‘열중성자’로 불린다. 열중성자는 물질에 부딪히면 에너지를 잃게 되는데, 이렇게 에너지를 잃고 속도가 느려진 중성자가 냉중성자다.

하나로는 열중성자를 영하 253도의 액체수소에 통과시켜 냉중성자를 얻는다. 냉중성자는 단백질이나 세포막 등을 살아있는 상태에서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다. 현재 냉중성자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을 비롯해 프랑스·독일·미국·호주 등 8개국뿐이다.

냉중성자 연구시설은 융합기술 시대에 맞춰 BT(생명공학기술), NT(나노기술), IT(정보통신기술) 등의 융합연구 핵심시설로 활용될 예정이다. 여기서 연구된 결과물은 전자부품을 비롯해 컴퓨터 칩, 평판디스플레이 개발에 활용되는 나노소재 원천기술 개발과 난치병 치료에 활용되는 약물전달 물질 개발, 초대용량 기억용 자성재료·고분자 및 세라믹 신소재 개발, 고밀도 에너지 저장소재 개발 등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수출 효자 ‘연구용 원자로’


연구용 원자로는 막대한 부가가치를 얻을 수 있는 수출상품이다. 한국은 이미 2009년 요르단에 연구용 원자로(JRTR)를 수출했다. JRTR은 원자력연과 ㈜대우건설 컨소시엄이 2009년 12월 수출에 성공(1억 6000만 달러 규모)하고 2010년 6월 사업에 착수해 6년여에 걸쳐 진행된 사업이다.

요르단 북부 이르비드(Irbid)에 위치한 요르단 과학기술대학교(JUST)에 5MW 규모의 연구용 원자로와 원자로 건물, 동위원소 생산시설, 행정동 등을 건설하고 운영요원 양성을 위한 교육 훈련까지 완료한 바 있다. 한국이 연구용 원자로 도입국에서 공급국으로 자리매김하고, 국내 원자력 기술력이 세계 원자력 시장에서 명실상부하게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국은 JRTR의 설계, 제작, 건설, 시운전 경험을 기반으로 연구용 원자로 신규 건설 및 성능 개선 사업 등 해외 시장 진출을 지속해서 추진할 계획이다.

2014년에는 네덜란드 연구로 개선사업을 수주해 현재 진행 중이다. 원자력연은 2014년 냉중성자 설비 기술을 네덜란드 델프트공대에 수출하기로 확정하며 원자력 선진국인 유럽 진출에 처음 성공하는 쾌거를 이뤘다. 네덜란드 델프트공대에서 현재 운영중인 연구로의 열출력 증강을 위해 시설개조 및 냉중성자 연구설비 구축을 완료하는 것으로 총사업비는 1900만유로(한화 260억원) 규모다.

‘KAERI 컨소시엄’은 원자력연과 현대건설, 현대엔지니어링으로 구성됐으며 원자력연은 원자로집합체, 냉중성자설비 등 핵심계통설계를 맡고 현대건설은 기자재 구매·설치·공사를, 현대엔지니어링은 공정 및 보조계통 설계를 맡았다. 이번 국제입찰은 KAERI 컨소시엄이 글로벌 원자력 기업인 아레바(프랑스), 누켐(독일), 니이켓(러시아) 컨소시엄과 마지막 경합을 벌인 끝에 성공했다.

그동안 한국은 하나로 자력 설계·건조·운영을 비롯해 아랍에미리트(UAE) 상용원전 수출, 요르단 연구로 시스템 일괄수출, 태국 연구용 원자로 개선사업, 말레이시아 연구용 원자로 디지털 시스템 구축사업 등을 진행해왔지만 대상국들이 중동과 동남아에 한정됐었다. 그러나 이번 사업 수주로 프랑스(ILL)와 독일(FRM-2) 등 세계 최고 성능의 연구로가 존재하는 유럽에 국산 연구로를 수출하게 됨에 따라 국내 원자력 기술력이 세계 최고 수준임을 확인했다.

원자력연이 ‘토종’ 연구로인 ‘하나로’를 완공한 건 1995년이다. 이후 2003년 냉중성자 설비를 만들어 하나로에 연결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7년에 걸친 시행착오 끝에 2011년 냉중성자 설비가 본격 가동되자 그 성능은 프랑스, 미국에 이어 세계 3위권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현재 세계 연구로 246기 가운데 30∼50기는 노후해 교체가 불가피하다. 네덜란드만 해도 이르면 올해 하반기 4억∼5억 유로(한화 약 5500억∼6900억원) 규모의 대형 연구로 건설 사업을 발주할 예정이다. 정재훈 기자 jjh119@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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