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소리 이을 명금에 혼신

▲ 국악기 만드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는 장씨 부자는 국악의 현주소에 아쉬움을 나타냈지만 작업장으로 돌아서면서 다시 한 번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결의를 다졌다. /김대환 기자
대전시 동구 성남2동 200번지. '대금제작소'라는 간판이 허름하게 달린 이곳은 장용혜·동준 부자의 꿈이 무르익어가는 산실이다. 대금·중금·소금·단소·퉁소·향피리 등 등 갖가지 악기들이 쌓여 있는 10평 남짓의 공간. 선한 눈매에 수더분한 성품까지 그대로 닮은 부자는 대나무 냄새가 진동하는 작업실에 틀어박혀 온종일 악기를 만든다.

"묵직하고 오래된 쌍골대나무로 만든 대금이라야 심금을 울리는 소리를 냅니다."

대금의 재료로는 양쪽에 골이 지고 속이 꽉 찬 일종의 기형 대나무인 쌍골죽 가운데 3∼5년생 대나무 중 살이 꽉 찬 것을 사용한다. 좋은 재료를 구하면 우선 삐뚤빼뚤한 대나무를 불에 구워 반듯하게 펴서 다듬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는 이 작업이 여간 힘든 게 아니라고 한다. 이런 다음 소리의 높낮이가 규격화돼 정악 연주에 사용되는 정악대와 산조 연주에 쓰이는 산조대로 구분해 주문에 따라 위치와 간격을 맞춰 구멍을 뚫는다.

입을 대고 부는 취구, 갈대 속으로 덮어 떨판 구실을 하는 청공, 여섯 손가락이 닿는 지공, 음높이를 조절하는 칠성공 등 구멍을 뚫으면 은은하고 처연한 소리를 내는 한 개의 대금이 비로소 태어난다.

그럭저럭 쓸 만하면 80만∼90만원, 썩 괜찮은 것은 하나에 150만원까지 받는다. 비싸게 구입한 재료지만 도중에 맘에 들지 않으면 미련없이 불쏘시개로 아궁이에 밀어넣을 만큼 엄격하기 때문이다.

30여년 동안 혼신의 힘을 쏟아 대금 만들기에 몰두해 온 장용혜씨는 이제 둘째 아들 동준씨가 허드렛일을 거들어 한결 든든하게 대금을 만들고 있다.

장용혜씨는 전남 담양 사람이다. 그의 대금 만들기는 죽공예를 하던 집안 내력에서 비롯했다. 당시 담양 고향집에선 10집 가운데 8가구는 죽제품을 가공으로 생계를 이어갔고, 그의 식구들도 모두 죽가공에 매달렸다. 5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장씨는 어릴 적부터 대나무 돗자리는 물론, 대나무 화분받침과 TV 박스 등 각종 죽제품을 만들어왔던 터라 대나무 다루는 것이라면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손님 가운데 한 명이 대금을 들고 왔는데 그 연주 소리에 매료돼 대금을 연구해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

"어려운 형편에 초등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애태우던 사춘기 시절 해거름녘 들려오던 청초한 대금 소리가 그렇게 마음을 파고들 수 없었어요."

장용혜씨는 이후 대를 꺾어 스스로 대금을 만들어 보았고, 이게 그가 대금 만들기의 외길에 들어서는 단초가 됐다.

"악기에 대해 책을 읽고 배운 건 없어요. 그냥 들여다보면 어떻게 고쳐야 할지 감이 왔지요. 드나드는 음악인들 옆에서 서당개 노릇 몇년 하다보니 저절로 문리가 트이대요."

그러나 불법 유통만 난무할 뿐 악기 제작 분야는 황무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에서 꿈을 펼치기는 쉽지 않았다.

결혼 후 서른 살 무렵 그간 모은 돈을 털어 고향에 직원 30여명을 둔 수공예 악기 제조공장을 세워보기도 했지만 플라스틱으로 대량 찍어내는 값싼 악기의 대량 물량 공세에 못이겨 공장을 접어야 했다.

이후 대나무 20자루와 대금 만드는 칼 한 자루를 들고 서울로 상경했고, 낮에는 거리의 악사로 대금을 연주하고 저녁에는 대금을 만들어 팔아 가며 생계를 유지했다.

떠돌이 악사이자 숨은 장인이었지만 그의 악기 만드는 솜씨는 입소문을 통해 인정을 받게 됐고, 전국 200여 악기점에 납품도 성공했다.

버려진 대나무도 그의 손을 거치면 하늘의 소리를 내는 악기로 만드는 장씨는 타고난 손재주를 발휘해 스스로 비법을 터득해 가며 이 분야의 일가를 이루게 된 것이다.

20년 전부터 그는 제2의 고향인 대전에 정착, 대금 만들기에 몰두하고 있다.

장용혜씨는 "연주를 많이 들어야 좋은 악기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악기 제작 도중 심신이 피로할 때면 아들 동준씨와 함께 정좌하고 대금을 분다.

아들 동준씨가 아버지의 허드렛일을 도운지 5년. 처음엔 국악이 홀대 받는 현실에서 악기 제조만으로는 생계유지도 어려운 상황에서 가업을 이어갈지 갈등도 많았다.

동준씨는 3년 전에는 대금산조 명인 원장현(55) 선생의 금현국악원에 들어가 대금을 배웠다. 찬바람이 부는 겨울 어느날 선생이 들려준 은은한 대금 가락에 넋이 빠진 동준씨도 아버지처럼 그 길로 대금연주와 제작을 평생업으로 삼겠다고 결심했다.

요즘도 장씨 부자는 내로라 하는 명인들을 찾아다니며 대금연주 익히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마음을 헤집고 파고드는 호소력 짙은 대금소리에 반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대로 연주하는 법을 알아야 '명금'을 만들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아들 동준씨도 한눈에 좋은 대나무를 알아본다. 대금제작에서 선배 장인들이 비법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것처럼 장용혜씨는 아들에게도 엄격하다. "마음에 흡족한 정도가 돼야 대금 제조의 핵심 비법을 전수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어려운 길을 따라준 아들이 든든하고 자랑스럽다.

피노키오 할아버지처럼 종일 뚝딱뚝딱 악기를 만들어내는 장용혜씨. 고군분투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금 장인이 되고자 하는 아들 동준씨. 언젠가는 자신들의 구슬땀이 열매 맺을 날이 올 거라고 믿는 이들 부자의 얼굴에선 옛 장인들의 고집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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