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연 공주대 겸임교수
[수요광장]

원불교에서 전 교단적으로 펼치고 있는 ‘감·사·잘·함’은 마음공부 표어이다. ‘감사해요, 사랑해요, 잘 했어요, 함께해요’는 종교를 떠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펼쳐야 할 캠페인이 아닌가 싶다. 이 캠페인을 접하면서 원불교 문턱을 넘었던 때를 회상해 봤다.

세속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이니 절대적 존재에게 바라는 바가 이뤄진다는 자체를 믿지 않았다. 그럴 때 모친께서 “너는 천일기도를 하여 원불교 문턱을 넘었다”라고 했을 때 영민하지 못함은 설마 했다.

아마도 편견에 의한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다. 잘못하면서도 잘못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진실과 허위에 대해 알지 못함이었다.

잘못이 있으면 용서하고, 모르면 그때그때 물어서 배워야 한다. 때를 놓치면 철 지난 옷을 입는 것처럼 어색하다. 별것도 아닌 일에 우를 범하는 격으로, 의구심이 있으면 물어야 하는데 내일을 향한 소용돌이 속에서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에 관심 밖으로 밀쳐 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근원이 없는 물은 멀리 흐르지 못한다고 했는데 어찌 마음이 끌렸을까? 인과의 이치를 배우라는 섭리가 작용했음일까? 하루가 다르게 출렁이고, 요동치며 빠르게 격변하는 삶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호기심이 마음을 움직였다. 붙잡아도 어차피 가는 세월, 구경 한 번 가보자는 심정으로 아내와 가까운 K교당을 찾았다.

조용히 맨 뒷자리를 잡았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죽비에 맞춰 식이 진행됐다. 잠시 선 하는 시간이 지나고 설법을 하시는데 성질 급한 사람 급하게 행동하다 실수하고, 큰 소리 치는 사람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목청을 높이는데 그가 누구인가, 자신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그것을 자재할 수 있는 사람 또한 누구던가? 그것도 자신이 아니던가 등등 옳고 그름에 대한 삶에 귀감이 되는 말씀을 들으면서 어리석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위해 법문을 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법회가 끝나자 조용히 교당을 나왔다. 집으로 오면서 아내에게 “마음공부란 이런 것인가? 꼭 내 말을 하는 것 같아”라고 했더니 아내는 “무슨 소리야! 나 들으라고 한 것 같던데.”라며 미소를 지었고 다음 주에 다시 한 번 가보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삶을 뒤돌아보게 하는 시간이었다. 그 때 처음 들은 설법은 아직도 머릿속에 잔영으로 남아 있다. 돌이켜 보면 대부분 사람들이 머릿속으로는 다 알고 있지만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경계를 주의케 하는 법문이었다. ‘실천하지 않은 앎은 아는 것이 아니다’라는 법문은 평소에도 잘 챙겨야할 가르침인데 대부분 그러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 아닌가 싶다.

원불교를 접하고 3년여가 지났을 때쯤 친구들로부터 “야! 너 많이 변했다. 너 많이 달라졌는데 비결이 뭐냐?”라는 질문을 심심찮게 받았다. 그럴 때마다 정말 내가 변했나? 어떻게 변했지? 봄에 대추나무 새싹 돋듯, 어찌 보면 고목 같고, 어찌 보면 새싹 보이듯 변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 후 어느 날 회사에서 직원들의 잘못을 보면서 아! 하는 나를 발견했다. 보통 때나 여느 때 같으면 즉흥적으로 잘못을 따져 엄하게 추궁했을 텐데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르며 화를 삭이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됐다. 말을 해서 상대에게 상처 주는 말은 삼가라, 질타와 격려의 말을 부드럽게 하라 등등 아랫사람 뿐 아니라 나와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에 자존감을 높여주는 것이 일 잘하는 사람이고 그래야 존경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면서 달라지고 있었던 것 같다.

감사해요, 사랑해요, 잘 했어요, 함께해요 ‘감·사·잘·함’을 모두가 실천해 행복한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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