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인의 계절
[충청로]
2014-01-15 나재필 기자
▶'왜 눈은 오고 지랄이야/왜 바람은 불고 지랄이야.' 참으로 추웠다. 말술을 마시고 뻗어서 새벽까지 뒤척이다가 처남의 발인의식을 치렀다. 속깨나 썩이던 망자(亡者)였지만 어느 주검이라도 억울함이 있고, 하염없이 쓸쓸하다는 걸 절감했다. 삽과 곡괭이로는 얼어붙은 땅이 열리지 않았다. 포클레인이 망자가 놀랄 만큼의 기계음을 내며 겨울 문을 두드린다. 그 깊이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는 심연이다.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암전의 별리다. 땅에서 태어나 땅으로 돌아가는 길, 하관(下棺)하는 여섯 명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불현 듯 떠나는 자와 남은 자와의 괴리감이 아프게 절멸한다. "비루먹을…."
▶목사가 부활의 '간증'을 하고 있다. 무신론자에게는 다분히 '위증'같은 것이다. 정녕 천국과 극락이 있단 말인가. 천당에 가기 위해 '신(神)'에게 예금을 들고 '자신'에게 보험을 드는 일은 어쨌든 가엾다. 설령 부활한들 육신(體) 없는 혼백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질 수가 없다. 부재(不在)는 그냥 부재다. "망자여, 부디 세상을 탓하지 말고 홀연히 잠드소서. 태어난 곳을 탓하지 않는 꽃처럼…." 겨울이 가면, 다시 봄이 오듯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고 있다. 발인(發靷)의 계절이다. 여기저기서 인공호흡기를 쓰고 주사액 줄을 주렁주렁 매단 채 죽어간다. 두렵다. 그 두려움은 무신론자의 엄살이 아니다. 소멸에 대한 공포다.
▶'자살'을 거꾸로 읽으면 '살자'다. '삶'은 '사람'으로 읽힌다. 결국 삶은 죽음이며, 사는 것은 동시에 죽는 것이다. 웃기는 패러독스다. 인간(人間)은 사람 인(人)에 사이 간(間)자를 쓴다. 그래서 인간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다. 죽음이 슬픈 것은 그 관계가 끊어지기 때문이다. 세월은 흐르는 게 아니라, 쌓이는 것이다. 그 '쌓임'이 오래될 때 사람들은 죽음을 맞는다. 컬러의 세상에서 흑백시대로 넘어가는 밀봉된 침묵이다. 우린 세상을 떠날 때가 돼서야 자신에게 솔직해진다. 죽음을 앞둔 시점에야 현명해진다. 누구에게든 죽음이란 억울하지만, 억울한 구석이 없도록 '살아야'한다. 아니 견뎌야한다.
나재필 편집부장 najepil@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