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같은 인생
[충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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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물이 낭자한 침대에 여자가 쓰러져있다. 발가벗겨진 그녀의 몸에 붉디붉은 혈루가 흐른다. 죽을힘을 다해 반항한 듯한 음부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다. 숨은 붙어있으나 분명 겁간(劫姦)의 흔적이다. 여자 옆에는 혼백이 나간 한 남자가 죽어있다.
이때 현관문을 밀치고 또 다른 사내(준)가 들이닥친다. (중략) 소설 속 주인공 '청연'과 '준'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하지만 이 짧은 '5분의 사건'으로 둘의 '50년 인생'은 파국을 맞는다. 죽어있는 남자는 여자의 직장상사다. 국과수 부검결과 이 남자의 정액은 검출되지 않았다. 놀랍게도 청연의 몸에서 나온 것은 갓 마르지 않은 '준'의 정액이었다.(…)
▶20년 전에 쓴 소설 '파국'의 일부다. 200자 원고지 2000장, 24만자 분량이다. 물론 '처녀작'으로 출판될 뻔했지만 결국 '사산'됐다. 당시엔 낙담이 컸으나, 생각해보면 허섭스레기 같은 작품이 세상 밖으로 '출산'되지 않은 게 천만 다행스럽다.
그때는 급전이 필요해 관음증을 자극하는 작품이 필요했다. 근래 5년 6개월간 또 한 번 본연의 생살을 뜯으며 200자 원고지 2000장, 24만자 분량의 원고지를 채웠다. 이 또한 퇴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더 늦기 전에 '출산'하기 위해 몸을 풀고 있다.
선데이 서울의 주제어는 결혼, 배신, 살, 체취, 용두질, 탈선, 욕정이었다. 여기에다가 여자 수영복사진은 23년간 단 한 차례도 빠트리지 않을 정도로 벗기는데 집착했다. 장삼이사들은 겉으론 음란한 도색잡지라고 손가락질 했지만 숨어서는 키치(Kitsch)적 관음을 즐겼다. 이제 세상이 바뀌어 외설은 '눈'(종이)에서 '손'(스마트폰)으로 옮겨가고 있다.
▶노숙, 허기, 퇴짜, 배신, 좌절, 상처로 점철된 무라카미 하루키는 세계적인 작가다. 내놓는 족족 수백만 권이 팔려나가니 책 쓸 시간보다 돈쓸 시간이 없다. 하루키스트(하루키의 열성팬)들은 그의 또 다른 '출산'을 기다리고 있다.
나 또한 가을바람이 부니 문기(文氣)가 짙어진다. 불현듯 (거쳐 간) 소수의 사랑들과 (거쳐 간) 소수의 문자(文字)들이 떠오른다. 골방에 처박혀 요분질을 상상하며 소설 쓰던 청년의 눈물도 오버랩 된다. 누구나 소설 몇 권쯤은 나오는 인생이다. 사는 게 소설이고 사는 게 작품이기 때문이다. 책 읽기 좋은 계절의 진앙에 와있다.
나재필 편집부장 najepil@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