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민 힘으로 '희망'을 세웠는데…

['해방기념비'를 옮기자]①'부민' 십시일반 조성

2007-04-16     전진식 기자

대한민국 독립 1년 만인 1946년 8월 15일 대전역 광장에는 '을유팔월십오일기렴 해방기념비(이하 을유해방기념비)'라는 커다란 비석이 세워진다.

그리고 기념비 양 옆에는 비석 수호 '엄명'을 받은 해태석상 한 쌍이 놓여진다.

그 후로 60여 년이 지난 오늘날, 해방의 기쁨과 함께 다시는 뼈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대전시민의 의지가 담긴 을유해방기념비는 시민들이 쉽게 볼 수 없는 보문산 골짜기에 처박혀 있다.


전쟁 때 빗발치는 포화 속에서도 기념비를 지켜낸 해태상은 제 주인을 잃은 채 서울로 옮겨졌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기념비 등의 존재 자체를 기억하는 이들이 극히 드물다는 점이다.

대전시민의 염원으로 만들어진 을유해방기념비의 의미를 다시 살펴보고, 방치되고 있는 현실의 문제점, 이전·복원 필요성 등을 심층분석해 본다.? /편집자

<글싣는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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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부민' 십시일반 조성

②? 방치된 대전의 자존심

③? 숲에서 다시 광장으로

대전시 중구 대사동 보문산 기슭에 있는 을유해방기념비는 그 자체로만 볼 때 1960년 또는 1987년 다시 만들었다는 오해를 부를 수 있다.

비신 좌측의 '1950년 9월 6·25사변으로 도괴'됐다거나 '1960년 6월 6·25사변 후 대전역 광장에 재건'했다는 기록, 비신 우측의 '1987년 7월 29일 이곳 보문산공원에 안치하다 00 정00 세우고 00 윤00 쓰다'라는 기록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1999년 대전시가 펴낸 '사진으로 보는 대전시사'에서 새롭게 확인된 1950년대 전쟁 직후 대전역 사진 등을 보면 현재 보문산에 있는 을유해방기념비가 전쟁 중 파괴돼 새로 건립된 것이 아닌 1946년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1957년 5월 해치석 한 쌍 동작동국립묘지에 기증'했다는 기록을 토대로 추적한 결과, 당시 해태상은 서울 국립현충원 무명용사탑 입구에 온전히 서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을유해방기념비가 갖는 가장 큰 의미는 해방 1주년에 맞춰 대전시민들이 정성 들여 대전역 광장에 세웠다는 점이다.

해방 직후 한반도는 좌우의 첨예한 대립 등으로 정국이 극도로 혼미했다.

이념을 앞세운 헤게모니 다툼과 그로 인한 쌍방 간 야만적 행위, 외세의 개입 등은 국민들로 하여금 해방의 기쁨을 누릴 새 없이 혼란케 했고, 기념비를 만드는 일 등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대전은 혼란한 중에도 정확히 해방 1주년에 맞춰 기념비를 세웠다.

3m가 넘는 비석 규모나 해태상 한 쌍을 나란히 세운 점으로 볼 때 당시로서는 큰 돈이 들었을 것이 분명한데, 치밀한 계획 하에 추진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전국적으로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해태상은 뒷다리 근육까지 섬세히 표현돼 있고 균형 및 조화가 완벽에 가까운 조형물이라는 평가다.

또 기념비 건립을 주도한 인물 등이 있을 법하지만 행여 그 의미가 퇴색할 것을 우려한 것인지 그 누구의 이름도 새기지 않고 '대전부민 일동'이라고 한 점도 의미가 크며, 수천 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도록 비문을 깊게 음각한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대전역 광장에 기념비를 세운 것은 대전시민들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역을 오가는 수많은 후대인들에게 치욕의 역사를 잊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한 관계 전문가는 "해방 직후 12만여 명에 불과했던 대전부민들이 해방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비를 만들었던 점은 어지간한 정성과 열의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그 크기나 해태상을 함께 세웠다는 점에서 전국에 내놔도 손색 없는 '대전의 자랑'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