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초개인화 시대, 영화는 다시 정의된다

최지안 대전시청자미디어센터 전문

2025-11-19     충청투데이

영화는 오랫동안 감독이 펼쳐 놓은 하나의 세계를 많은 관객이 함께 바라보며 해석하는 예술이었다. 그러나 생성형 영상 기술이 가파르게 진화하면서 이 오래된 전제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흔들리고 있다. 텍스트 몇 줄과 이미지 몇 장만으로 장면을 합성하는 시대다.

이제 창작의 문턱을 넘는 데 거대한 장비도, 복잡한 공정도 더 이상 필수가 아니다. 오픈AI의 소라(Sora)를 비롯해 구글의 비오2(Veo 2), 런웨이(Runway)의 젠-3 알파(Gen-3 Alpha) 등은 텍스트만으로 사실적 물리 효과와 연속된 장면을 구성하며 영상 생성 기술의 가능성을 크게 넓히고 있다.

이 기술들은 영화 제작의 출발점이 더 이상 대형 스튜디오가 아닌, 개인의 책상 위로 옮겨가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 흐름은 하얼빈공대와 칭화대 연구진이 공동 발표한 ‘필름에이전트(FilmAgent)’ 연구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필름에이전트는 창작자가 제시한 한 줄의 발상에서 출발해, 여러 AI 에이전트가 실제 제작팀처럼 역할을 나누어 영상을 만들어 낸다. 시나리오부터 카메라 무빙, 조명, 색감, 편집까지 분업 구조를 재현하며, 전통적 제작방식의 핵심을 AI가 실험적으로 구현한 사례다.

변화는 현장에서도 감지된다. 올해 열린 런웨이(Runway) AI 영화제에는 6천 편이 넘는 작품이 출품됐다. 비용과 기술 장벽이 낮아지자 학생, 직장인, 취미 창작자들이 각자의 세계를 영상으로 구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감독이 될 수 있는 문턱이 눈에 띄게 낮아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현상은 단순한 기술 발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 배경에는 인간이 세계를 경험하고 이해하는 방식의 변화가 깔려 있다.

철학은 오래전부터 이렇게 말해왔다. "세계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고 인식하는 방식대로 구성된다." 전통적 영화가 감독의 시선으로 세계를 ‘재현’했다면, AI 기반 초개인화 제작 환경에서는 그 시선이 근본적으로 바뀐다. 이제 영화는 세상을 비추는 렌즈가 아니라, 창작자인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된다.

AI는 나의 취향, 기억, 감정 패턴을 읽어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세계를 조립한다. 초개인화는 ‘추천 알고리즘’의 확장판이 아니라 개인의 세계관을 시각적으로 확장하는 장치로 진화하고 있다. 이 현상학적 관점은 오늘의 변화가 왜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인식 방식의 전환과 맞닿아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렇다고 기존 영화의 가치가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초개인화 영화가 개인의 내면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라면, 극장에서 함께 보는 영화는 여전히 사회적 감정을 연결하는 장치다. 개인의 영화가 ‘나’를 확장한다면, 우리의 영화는 ‘관계’를 확장한다. 두 세계는 경쟁이 아니라 서로 다른 욕구를 채우는 두 축처럼 작동한다.

기술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고, 작은 상상 하나가 새로운 서사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남은 것은 우리가 어떤 세계를 만들어 보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묻는 일이다. 남이 만든 세계를 계속 소비할 것인가, 아니면 나만의 세계를 조용히 시작해 볼 것인가. 미래의 창작자는 특별한 재능을 지닌 소수가 아니라, 한 걸음 먼저 내딛는 평범한 사람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