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꽃시단] 빈손

윤계순

2025-09-23     충청투데이

늦가을 나무 밑엔
빈 손바닥들이 많다

남들은 여름 동안 새파란 초록을
가득 쥐고 있었다고 생각하겠지만

분간 없는 바람을 쥐고
있었다고도 하겠지만
나뭇잎은 멀고도 먼 곳에서 오는
햇빛을 꽉 쥐고 놓지 않았던 것이다

여름 거쳐 가을이 오면
나무 한 그루 통째로 혼들던
그런 힘은 이제 놓치고
거느렸던 열매들 모두 거뒤들이고
작은 바람에도 갈 듯 말 듯 들썩인다
군데군데 벌레 먹은 흔적까지 내려놓는다

나뭇가지 사이 각혈 같은 빈손,

밤낮 쥐는 일에 열중했던 수작에서 놓여나
홀가분할 때도 있다

이제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고 여름의 폭염은 저만치 갔는가. 숲으로 가면 여름내 울던 매미 소리는 떠나고 매미가 벗어놓은 허물만 남아서 잔잔한 바람에 흔들대고 있다. 이제 그 안으로 눈송이가 들어가 추위에 얼어 얼음 매미가 태어날 시간도 다가오려는가. 지난여름이 엊그제인데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만도 어느새 신기할 정도다. 그러니 우주의 흐름과 이법은 엄연한 질서가 있고 다 때가 있는 것이다. 조만간 추위에 떨면서 어서 봄이 오라고 기도할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일러 천행건(天行健)이라 했다.

손은 무엇을 쥐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놓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느 해탈한 선사의 말씀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실 우리 손은 무엇을 쥐고 있을 때보다 쥐고 있던 그것을 놓아버렸을 때가 더 편한 것이니 그게 진리일 수 있겠다. 이제 가을 숲에 떨어질 낙엽들은 모두 빈손일 것이다. 그것들은 멀고도 먼 곳에서 오는 햇빛을 꽉 쥐고 놓지 않았던 것. 그러니 나뭇잎들은 모두 비움에 익숙한 것이다. 하여 스스로 쥐었던 햇빛을 내면으로 가득 쟁여 안고 어떤 어둠이 와도 거기에 갇히지 않는 것이다.

- 김완하(시인·시와정신아카데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