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꽃시단] 이 세계

김행숙(1970~ )

2025-07-08     충청투데이

 

ChatGPT AI 제공

이것을 이 상자에 넣었으므로 저쪽 상자엔 넣을 수 없지
이것이 네 신발이야
걷고 뛰어라, 상자가 충분히 커다랗다면 저쪽 세계를
기웃거릴 이유가 없지
쫓아가는 경찰도

쫓기는 도둑도 모두 죽어라 뛰어간다
상자를 살짝 흔들면 경찰이 쫓기고 도둑이 죽어라 쫓아간다, 옷만 바꿔 입었을 뿐인데
밤이 오면 너는 신발을 성경책처럼 가슴에 품고 잠이 드네
내 아기, 세상모르게 잘 자라, 모든 강물이 다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넘치는 일이 없단다
나는 신발 공장의 일개 노동자
새 신발을 새 상자에 넣는 일을 한다네
상자 속에, 상자 속에, 상자 속에, 상자 속에.........하, 이것은 끝이 없네
이것이 깊고 깊은 어둠이야
어둠 속으로 손을 넣어 잘 찾아봐, 이것이 네 신발이야

시 쓰기란 언어의 드리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운동장에 공이 하나 구르고 그것을 향해서 두 팀으로 나뉜 선수들이 공수를 번갈아 가면서 상대팀의 골문을 노리는 것. 이때 갑과 을은 수시로 바뀌는 상태에 처한다. 시인과 독자. 이 또한 갑과 을의 양상에서 상호간의 역할을 바꾸어 가면서 종국에는 감동이라는 골문을 향해서 나아간다. 그렇다. 시 그것도 뭐 별것인가, 내용이고 형식이고가 뭐 그리 중요해. 그딴거 다 걷어치우고 감동만 주면 되지 뭐. 감동. 그런데 감동을 주기가 그리 쉬운가. 감동을 얻기가 어디 그리 쉽단 말인가. 그렇담. 진정으로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좋은 시가 되어야 한다.

"이것을 이 상자에 넣었으므로 저쪽 상자엔 넣을 수 없지." 이렇게 시인은 시의 운동장 안에 언어의 공 하나를 툭, 던져놓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연의 행에서 그 공을 몰고 다닌다. 얼핏 어느 게임을 표현하는 듯도 하다. 쫓아가는 경찰도 쫓기는 도둑도 모두 죽어라 뛰어간다. 상자를 살짝 흔들면 경찰이 쫓기고 도둑이 죽어라 쫓아간다, 옷만 바꿔 입었을 뿐이다. 이렇게 이 시의 전개는 돌발성과 상자를 두고 그 안과 밖의 역전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세계가 그렇다는 것이니. 낮과 밤이 바뀌듯이, 안과 밖이 바뀌듯이 말이다.

- 김완하(시인·시와정신아카데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