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시간의 온도
강미란 수필가
2025-04-24 충청투데이
아버지는 병원이 아닌 집에서 병마와 조용히 싸우셨다. 고통을 숨긴 채 묵묵히 일상을 견뎌내셨다. 그러던 어느 12월의 추운 아침, 화장실을 다녀오신 뒤 조용히 스러지셨다. 창밖의 바람은 살을 에었고, 방 안의 공기마저 숨 막히도록 싸늘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아버지와 이별을 마주해야 했다.
아버지의 유학 시절 사용하셨던 낡은 가죽 가방 안에는 열 권이 넘는 수첩이 보관되어 있다. 손때 묻은 그 수첩들엔 당신이 남긴 삶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용한 목소리처럼 담백한 글귀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따뜻하다. 그 문장 하나하나가 내게는 이정표가 되고, 깊은 그리움이 되며, 조용한 위로가 된다. 시간은 단지 흘러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 사랑이 머물 때, 시간은 다시 돌아와 우리를 감싸준다.
어머니는 또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주셨다. 엄격하고 단호한 말투로 "하나를 해도 야무지게, 반듯하고 품격 있게 행동하라"고 말씀하시던 분. 그때는 차갑게만 느껴졌던 말들이 이제 와서는 내 삶을 지탱해 주는 따뜻한 중심이 되었다. 떠난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다.
사람들은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 그리움이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움의 온도는 마음 깊은 곳을 천천히 데운다. 처음엔 눈물로 번지던 기억이, 언젠가 미소로 번지고, 그 미소가 다시 삶의 원동력이 된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더 깊어질 뿐이다.
시간은 단순히 흐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움을 데우는 그릇이다. 남겨진 말과 삶의 기록, 떠난 이의 눈빛 하나가 삶의 온도를 결정한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조금 더 다정하게, 천천히 기다려주며, 따뜻하게 살아야 한다. 받은 온기를 누군가에게 건네고, 지금 곁에 있는 이들에게 말해 주어야 한다.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지금 여기에 함께 있어 줘서 참 고맙다고.
시간은 흐른다. 그러나 그 위에 사랑을 얹으면, 그리움은 따뜻해진다. 가끔은 잊히지 않는 이름들을 조용히 마음속으로 불러본다. 삶은 어쩌면, 차가운 시간을 따뜻하게 데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기억을 품고, 사랑을 새기며, 우리는 각자의 온도로 시간을 살아간다. 그것이 바로, 시간의 온도다.